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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밭고랑»에 겸손 → 겸손과 자아 포기 항이 있음.

마치 그대가 중심이나 되는 것같이 그대가 모든 것을 당신 자신을 싸고 돌게 만들기 때문에 그대는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그대는 배가 아프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피곤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네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했고···

그대는 주님 하느님에 관해서, 그리고 주님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 관해 생각해 보려고 한 적이 있습니까?

“자아의 목을 잘라내야만 합니다"라고 당신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슬픔과 불안은 그대가 낭비한 시간에 비례해서 자라납니다. 그대가 일분일분을 사용하는 데 거룩한 조바심을 느낄 때에는 그대는 기쁨과 평화로 채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당신 자신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걱정거리? 그대에게 말했듯이 전 걱정이 없습니다.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대는 할 일을 많이 얻었으니, 그대의 “문제”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정직해지십시오: 그대는 주님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하였으니, 그대는 더이상 당신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사에 관해 생각할 시간은 없습니다.

슬퍼해야 할 일이지만, 그대는 토대가 되는 징검다리처럼 아무도 보지 못하고 건물을 지탱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그거야말로 사악한 인간이 하는 짓 아니겠습니까?

자기 일은 잊어버리십시오. "당신의 형제를 위해, 사람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생각하며 사는 것, 한마디로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 당신의 야심이어야 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의 기쁨 속에서 마리아만이 포도주의 부족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작은 일이라도 깨닫는 것은 마리아처럼 하느님을 사랑하지만 결코 열렬히 이웃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뿐입니다.

비록 그대가 주님을 따라간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이런저런 방법으로 일들을 하는 것은 언제나 ‘그대의’ 계획들에 따라, ‘그대의’ 힘에만 의존하여 해나가는 당신임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

사람들은 그대가 그대의 “권리”라고 부르는 것을 무시했는데, 그대의 권리를 저는 그대의 “거만해질 권리”라고 그대에게 번역해 드립니다. 그대는 어찌 그리도 우스꽝스러운 형상을 만들어냈나요. 그대의 공격자가 강력하였기 때문에 그대는 자신을 방어할 수 없었고 그대는 백 번이나 따귀를 맞을 정도의 모욕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당신 자신을 낮추는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대의 양심이 그대를 거만하고 비겁하다고 부르면서 그대를 나무랍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십시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의 ‘겸손해져야할 의무’를 흘끗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항상 나, 나, 나입니다. 그대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행동하도록, 주님, 주님, 주님일 때까지는 결코 그대의 능률은 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중심에 두고 겉돌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 것 같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