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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밭고랑»에 진실 → 진리에 대한 공격 항이 있음.

“왜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퍼뜨립니까?”하고 괴로워하며 그대가 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으로나, 열광으로나, 또는 악의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이야기를 타성과 천박함과 무지로 전해 나갑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강조합니다: 그대가 찬양할 수 없고, 그리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때에는, 조용히 하십시오!

중상모략의 희생자들이 침묵 속에서 고통을 참는 동안 ‘사형집행인’들은 겁을 집어치우듯 허세를 부리며 흥분합니다.

당사자와 이야기해 볼 수도, 말할 의지도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면 설령 단언된 것이라 해도 믿지 말아야 합니다.

앙케이트를 실시하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약간의 악의만으로 아무리 고결한 사람이나 경의를 표해야 할 단체에 대해서도 중상을 들어 모아 두툼한 책 열 권으로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사람이나 단체가 효과적인 일을 할 때 욕설은 더욱 심해지지만 그 효과적인 일이 사도직이라면 더욱 그것을 부추기는 듯 심해집니다.

장본인들은 참으로 슬퍼해야 할 짓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슬퍼해야 할 것은 이처럼 사악하고 천박한 패거리의 스피커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의심이란 그것이 지식 분야에 관계되거나 다른 것들의 좋은 이름에 관계되거나 간에 뿌려지기는 쉬우나 뿌리뽑기는 매우 어려운 식물입니다.

위선을 배양하는 사람은 반드시 불쾌하고 원한에 찬 희생의 삶을 살게 됩니다.

헤로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서 그 아기를 잘 찾아 보시오. 나도 가서 경배할 터이니 찾거든 알려 주시오.” 그러한 제안에 직면해서는, 겉으로 보기에 선의의 사람이라고도 보이는 사람들의 ‘보호’ 나 또는 ‘좋은 일들의 약속’을 피하게 해 주십사고 성령께 청합시다.

동방 박사들이 그랬듯이, 우리가 진실을 찾고 성실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비추어 주심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대가 일들을 분명하게 말하기 때문예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불안한 양심을 가지고 살고 있고, 그래서 그들은 그런 양심을 그 방법으로 덮어 가리울 필요가 있는 것이겠지오.

그들이 변화하는 것을 돕기 위해, 그대는 계속 같은 방법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대가 계속 당신 이웃의 의도를 나쁜 믿음으로 해석하는 동안에는, 그대는 사람들이 당신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개혁이 필요하다고 당신은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당신 자신을 개혁하십시오. 당신에게는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개혁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리 당신이 쇄신입니다, 개혁입니다 한들 믿을 일이 아닙니다.

너무나 위선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정확히 그들 자신의 입술에서 나온 말을 되풀이할 때 분개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쩔 수 없을 만큼 참견으로 이웃 사람의 생활에 코를 박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당한 의지가 강한 사람을 만나 기선을 제압당하자 모욕을 당한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탄식해 보입니다.

당신의 그리고 많은 이들의 철면피한 태도와 비뚤어진 양심도 이쯤 되면 끝입니다.

단 한 수로, 그대는 참된 의견의 “올바른 의견을 말하는 성실한 사람이라고 하는 평판”과 "반대 의견이 가지는 비열한 이점”이라는 양쪽 모두를 한 손에 넣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은 어느 나라 말로도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얼마나 선량합니까! 그들은 오직 찬양할 가치일 뿐인 일을 “변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는 박해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박해자의 묵은 전략입니다. 통속적인 지혜는 바로 이것을 통해서 모든 것을 죽 보아왔습니다. 옛 스페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들이 돌을 던지고나서 자기 자신들을 붕대로 감는다.”

설마하면서도 유감스럽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타인을 중상해, 정의에 반하면서, 그 후에, 애덕입니다, 성실입니다라고 지껄여대며, 중상의 희생자에게 자신의 변호를 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이외의 가톨릭 신자를 나쁘게 다루면서 입으로는 에큐메니즘(교회일치운동)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에큐메니즘만큼 슬픈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이나 혹은 일들에 자신들의 일그러진 렌즈를 통해 초점을 맞추고서, 심술궂은 뻔뻔스러움으로 비판을 가하거나 또는 감히 자신들의 충고를 제공할 때 그들은 객관성에 대한 무척이나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확고한 결심을 하십시다: 우리가 바로잡아 주거나 또는 충고를 해 줄 때 하느님 앞에서 말하고, 그리고 우리가 한 말을 우리들 자신의 행동에 적용합시다.

언제라도 한탄할 것임에 틀림없으니까, 상대가 누구든 중상으로 공격하는 방법은 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물며 교훈을 주기 위해서와 같은 동기를 구실로 삼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그런 동기를 내더라도 도덕적으로 나쁜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 관해서 그리고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들에 관해서 우호적으로 말하는 습관을 들이고, 특히 그대가 하느님의 사업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 관해서 말할 때 그렇게 하십시오.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침묵을 지키십시오. 날카롭거나 또는 짜증나게 하는 비판은 뒷공론이나 비방을 초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더욱 전폭적으로 바친 한 청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제가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덜 이야기하고, 병자를 심방하고 마루바닥에서 잠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사제들에 관해서는 오직 그들을 칭찬하기 위해서만 말해야 합니다.

나를 포함해 모든 사제가 이 점을 깊이 생각하고 매일 처신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거짓말하는 데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과묵, 음모, 비방···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비겁한 자의 무기입니다.

하느님에게 충실한 친구에 대해 나쁘게 말한 사람들이야말로 그대가 좀 더 착하게 행동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대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모종의 표현은 이미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상처 입힙니다. 그래서 머리와 마음으로 주님의 뒤를 밟고 있다면 비판을 맑게 받아들이고 걸음을 빨리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뜬소문과 풍자를 퍼뜨리는 자들에 대해 방비하십시오. 어떤 자들은 반성의 결여로 말려들고 그밖에는 나쁜 믿음을 통해 그렇게 됩니다. 그들은 조용한 분위기를 파괴하고 대중의 의견에 해독을 끼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진짜 애덕 때문에 그런 남을 짓밟는 행위와 그 장려자를 고발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그 사람들과 그들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자신들의 일그러진 양심과 미숙한 양심대로, "침묵은 동의의 표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신과 내가 미소를 지으며 이 책을 덮을 수 있기를, 또 단순한 마음에서인지 악의에서인지 “길”의

999항목에서 신비스런 의미를 찾은 축복받은 독자들이 안심하게 되도록, 저는 이 번호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