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1964년 5월 28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강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인 오늘 우리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깊은 사랑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한데 모였습니다. 그 깊은 사랑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복되신 성체의 형상 아래 숨어 계십니다. 이로 인해마치 군중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 육신의 귀로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마태 13,3-6)

참으로 생생한 장면입니다. 씨 뿌리시는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씨앗을 뿌리고 계십니다. 그분의 구원사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 일을 나누어 맡길 바라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어떤 곳에서, 어떤 상황에서건, 당신의 사랑에 활짝 열려 있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가르침과 본보기를 통해 하느님의 거룩한 메시지를 이 땅의 가장 먼 구석까지 전파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구성원이자 시민사회의 일원인 우리들에게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될 것을 요청하십니다. 양심적으로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매일매일의 노동과 우리가 맡은 직업상의 책무를 거룩하게 함으로써 말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손수 만드셨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이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앞에서 우리가 읽었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진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참으로 많은 것을 일깨워주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수많은 영혼들을 흔들어 깨워 헌신하게 하고, 또한 충실하게 만듭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의 삶과 행동은 역사를 바꿔 놓았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마저도, 아마도 수많은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이상에 의해 자극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척박한 땅이나 가시덤불, 엉겅퀴밭에 떨어진 씨앗들이 신앙의 빛을 보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닫아버린 영혼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평화, 화해, 형제애 같은 이상들은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거짓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소용없는 안간힘을 씁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폭력을 쓰거나, 아주 교묘하게, 어쩌면 훨씬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은 사람의 정신을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빵 

이 모든 것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사명을 꼼꼼히 살펴봐야 합니다. 거룩한 성체를 바라봅시다. 주님을 향해 눈을 돌립시다. 그분은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한 부분으로 만드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1코린 12,27) 하느님께서는 감실 안에 계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우리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 우리를 강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의 일과 노력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감실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분입니다. 주님이 뿌리신 씨앗과 그 ‘씨 뿌리심’의 마지막 결과는 바로 ‘영원한 생명의 빵’입니다.

거룩한 성체의 기적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또한 성체는 예수님의 모든 개인적 특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분은 완벽한 하느님이신 동시에 완벽한 인간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가장 자연스럽고도 평범한 방법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양식(糧食)으로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2천 년 동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매우 긴 세월이지만 꼭 길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에 빠지면 시간이 빨리 가는 법이니까요.

저는 아름다운 시 한 편을 기억합니다. 현자(賢者) 알폰소 왕이 수집한 노래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노래는 어느 소박한 수도자에 관한 전설인데, 그는 성모님께 단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천국을 보여 달라고 간구했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고 그 선한 수도자는 낙원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천국에서 돌아와 보니 자신이 살던 수도원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매우 짧았다고 생각했던 그의 기도가 삼백 년이나 이어졌던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삼백 년이라는 세월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성체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저의 설명입니다.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이기적이고 변덕스럽지만, 당신의 한없는 애정을 깨닫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온전히 봉헌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찾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당신의 열망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 성체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 13,1) 복음서의 이 말씀은 요한 성인이 파스카 축제 전날 일어난 사건을 설명하는 서두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1코린 11, 23-25)

새로운 생명 

새로운 계약이 맺어지는 간명하면서도 장엄한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낡은 계약을 허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우리의 기도와 삶의 ‘내용’이 되실 것임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로 인한 우리의 기쁨은 오늘의 전례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렁차고 유쾌하게 기쁜 노래 함께 불러 용약하며 찬양하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새로운 시대를 노래하는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축제입니다. “새 파스카 새 법으로 낡은 예식 끝내도다. 새 것 와서 옛 것 쫓고 예표 가고 진리 오니 어둠대신 빛이 온다”

이것은 사랑의 기적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하느님 자녀들을 위한 빵이네” 영원하신 아버지의 아들인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의 음식으로 내어주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손님이자, 구원사업의 공동상속인이요, 동료”로서 받아들이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품은 사람들은 선종의 순간 땅에서는 죽지만,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행복이 시작됐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체’라고 하는 최고의 만나로 위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낡은 삶은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잊읍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말도, 행동도” 새롭게 바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가 꿈조차 꿀 수 없었던 깊은 사랑이 우리에게 전해졌기에 새로운 ‘소식’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기에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최고로 기쁜 일이지요. 그러기에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빵 안에 현존하시는 분… 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님께서는 제대의 성체 안에 숨어 계십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어 당신께 다가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양식이 되어주심으로써 당신과 우리가 하나가 되길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한 1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무능함을 탓하거나 어렵고 힘든 경로로 당신을 찾아오라고 강요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분께서는 바로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머물러 오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히 우리와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성제를 드리기 위해 제대 주위에서 서로 만날 때, 우리가 성광(聖光) 안에 계신 성체를 묵상하거나 감실에 계신 주님을 경배할 때, 우리의 신앙은 굳세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이 새 생명에 관해 깊이 생각해야 하며, 하느님의 사랑과 온유함에 감화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 2,42) 성경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신앙에 끌려 한데 모였고, 성체를 더불어 나누며 한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 완벽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신앙과 빵과 말씀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성체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확실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현존(現存)하신다는 서약입니다. 이는 또한 온 세상을 떠받쳐주시는 당신 권능의 언약이며, 구원을 확약하는 맹세인 것입니다. 이 구원의 약속은 세상 끝날에 인류 가족이 천국의 집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천국의 집에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한 분이며 유일하신 하느님인 복된 삼위일체를 만나게 됩니다. 빵과 포도주라는 겉모양 안에 실재(實在)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의 신앙은 약동할 것입니다.

말씀과 빵, 즉 기도와 성체 안에서 예수님과 끊임없는 친교를 맺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많은 신자들이 세대를 거쳐 성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온 여러 방법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식적인 성체현양 행사를 통해 신앙을 선포하는 방법, 교회의 평화 안에서 또는 각자 마음의 친밀함 속에서 조용하고 소박한 실천을 이어가는 방법 등 모든 종류의 성체현양 방법을 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미사를 사랑하고, 우리 생활의 중심에 미사가 들어서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에 충실하게 참석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주님의 현존 안에 우리가 항상 함께하기를 원하면서 그날의 남은 시간 동안 그분에 관해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이 일하셨던 대로 일하고, 그분이 사랑하셨던 대로 사랑할 준비를 하며 각오를 다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대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순간에만 현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당신의 친절하심에 감사드리는 법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감실에 보관된 성체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로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제게 있어서 감실은 언제나 ‘베타니아’였습니다. 베타니아는 그리스도께서 머무르셨던 조용하고 쾌적한 지역입니다. 베타니아에 살던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가 그랬던 것처럼 단순하고도 자연스럽게 우리의 걱정과 아픔, 소망과 기쁨을 그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어떤 마을이나 시골에서 우연히 교회와 마주칠 때 매우 기쁩니다. 그곳은 또 하나의 감실이자, 제 영혼이 자유로워져 성사(聖事) 안에서 스스로 주님과 하나 되는 또 다른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성체의 풍성함 

우리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 동안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을 때는 이미 밤이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에 따르면, 성체제정 시간이 밤이었다는 것은 “그때까지의 시간이 모두 끝났음”을 뜻합니다. 세상은 이미 어둠에 빠져든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옛 예식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드러내는 옛 징표들이 이미 실현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새벽, 새로운 파스카의 길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밤에 성체성사가 제정됐습니다. 곧 다가올 부활의 새벽을 준비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도 이 새로운 새벽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해롭거나 이미 낡았거나 쓸모없는 모든 것들, 예컨대 낙담과 의혹, 슬픔, 비겁함 같은 것들을 모두 내팽개쳐야 합니다. 성체는 하느님 자녀들에게 ‘거룩한 새로움’을 주십니다. 우리는 “정신을 새롭게 하여” (로마 12,2) 우리의 모든 감정과 행동을 새로이 변화시킴으로써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활력의 원칙’을 선사받았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온 강하고 새로운 힘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낡은 누룩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는 영원히 남아 있을 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는 전 세계 도시와 마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님과 함께 행진합니다. 성체 안에 숨으신 채로 주님께서는 당신이 지상에 계실 때와 똑같이 거리와 광장을 지나 주님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 나아가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찾지 않는 이들에게도 다가가십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한번 당신 백성들 속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사랑의 외적 징표는 마음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통해 사랑을 증거함으로써 표현됩니다. 만약 주님의 몸을 받아모심으로써 우리가 새롭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 사랑의 징표를 내보여줘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진정한 것이며, 평화와 자기희생과 섬김으로 가득하기를 기원합시다. 우리가 하는 말이 항상 진실되고 명확하며 올바른 때에 올바른 얘기를 하도록 간구합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도움과, 특별히 하느님의 빛을 가져다주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 언제나 한결같고, 효과적이며, 올바르게 해달라고 청합시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향기” (2코린 2,25)를 내뿜어 그분이 좋은 일을 하셨던 바로 그 방식을 떠올리게 합시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의 행렬은 전 세계 마을과 도시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그분의 현존은 한 번 듣고 잊어버리는 소음처럼 대축일날 하루로 그칠 수 없습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의 행렬로부터 우리는, 매일매일 이어지는 우리의 일상 활동에서 우리 주님을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합니다. 대축일의 장엄한 행렬 곁에 나란히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의 삶들이 소박하고도 조용한 행렬을 이루고 있습니다.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이며, 다행히도 신앙과 거룩한 임무를 받아 가진 이들입니다. 그들이 수행하는 거룩한 임무란 이 땅에서 주님의 메시지를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결점이 없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실수를 하고 죄도 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는 언제라도 그분의 도구로 쓰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행보를 계속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의 영혼이 복된 성체를 위해 헌신하게 해달라고 주님께 부탁드립시다. 그래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기쁨과 평화, 그리고 정의를 위한 열망을 불러올 수 있도록 간청합시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훨씬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류 활동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실 것이고,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요한 12,32)

빵과 수확, 모든 인류가 함께하는 영성체 

우리가 지금 이야기했듯이 예수님은 씨 뿌리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으로 그 일을 계속해나가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상처 입은 손으로 곡식을 눌러서 당신의 성혈로 적셔 깨끗하게 하시고 순결하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정결해진 씨앗을 밭고랑에, 이 세상에 뿌리십니다. 그분은 씨앗을 하나하나 심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결실을 맺는 것을 증언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길 안에 있다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분의 성혈을 한껏 머금어 우리들 자신이 바람에 실려 뿌려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해야 합니다. 씨앗이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땅에 묻혀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싹이 돋아나고 곡식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곡식으로부터 빵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으로 그리스도의 성체로 변화하는 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다시 한번 씨 뿌리시는 분인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1코린 10,17)

씨가 뿌려지지 않으면 수확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아낌없이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야 하고, 그분을 갈망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사람들이 오래 견뎌온 굶주림을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입니다. 진실과 정의, 일치와 평화에 대한 굶주림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인 것이지요. ‘평화에 대한 굶주림’과 마주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에페 2,14) 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뇌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열망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일치를 염원하는 이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게” (요한 17,23)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아야만 합니다. 정의에 대한 굶주림은 인류를 하나로 조화롭게 해주는 원천(源泉)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그 원천이라 함은 곧 우리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이고 서로가 형제이며, 그러한 사실을 우리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화와 진리, 일치와 정의를 우리는 갈망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조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없애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애의 기적을 일으키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은총으로 그리스도교적 삶의 방식대로 살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서로 남의 짐을 져주며” (갈라 6,2)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율법의 완성이자 본질인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만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경우를 들어보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실 때 아마도 바람에 일렁이는 밀밭을 보고 계셨을 겁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마태 9, 37-38) 그런 다음 일꾼들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마태 20,12)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 충실하지 못한 일꾼이라면 요엘 예언자가 얘기했던 상황이 발생하고 말 것입니다. “들은 황폐해지고 땅은 통곡한다. 곡식 농사는 망하고 햇포도주는 말라 버렸으며 기름은 떨어졌다. 밀과 보리를 생각하며 농부들아, 질겁하여라. 포도나무를 가꾸는 자들아, 울부짖어라. 들의 수확이 다 망가졌다.” (요엘 1, 10-11)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가라지를 뽑고, 곡식을 거두고, 타작하고… 길고도 고된 노동입니다. 우리가 꾸준히 넉넉하게 일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수확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 안에서, 시간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누구도 예외라고 여길 수 없습니다. 오늘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경배하면서 아직 쉴 때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많습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 땅을 가꾸는 이는 양식이 넉넉하다.” (잠언 12,11) 이 말씀을 우리의 영적 삶에 적용해봅시다. 우리가 하느님의 땅을 일구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거룩한 사명에 충실하지 않다면,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도록 돕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체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런 수고도 들이지 않은 일에 가치를 부여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거룩한 성체를 사랑하고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곡식의 낱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죽어 풍성한 생명을 길러내 백 배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하고, 우리 주위 사람들의 걱정을 더불어 나누어야 합니다. 또한 용서하고 이해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聖心)’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법을 배울 것이고, 명확하게 그리고 애정을 다해 진리를 수호할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려면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삶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서 없애버려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의 안락함에 대한 집착, 이기심의 유혹, 모든 일에서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성향 같은 것이 바로 그런 장애물들입니다. 오직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재현할 때만 그분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밀알의 죽음을 체험할 때에만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일할 수 있고, 내부로부터 세상을 변화시켜 결실을 맺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낙관주의 

그렇게 사는 것은 너무 좋은 일이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닐까? 가끔은 이런 생각에 빠져듭니다. 저는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을 새롭게 하는 일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차분히 생각하세요.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통해 우리의 모든 갈망이 이루어지리라는 명백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희망의 미덕에 우리가 진정으로 의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에 무덤덤해지지 맙시다. 특히 우리 주님께서 매일 사제의 손으로 내려오신다는 놀라운 사실에 둔감해지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깨어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의 권능을 확신하고 당신의 약속을 다시 한번 들을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르 1,17) 여러분은 많은 영혼들을 하느님께 인도할 쓰임새 큰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배에 올라타 노를 젓고 닻을 올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유산으로 주신 이 세상이라는 바다를 향해 나서야 합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루카 5,4)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사도적 열정이 거짓된 겸손으로 인해 약화되거나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개인적인 실패 때문에 엄청난 중압감을 경험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실수를 충분히 감안하고 계십니다. 자비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우리가 온갖 한계와 나약함과 불완전함을 지닌 피조물임을 알고 계십니다. 또한 죄에 이끌리는 존재들임을 아십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분투하라고 하십니다. 스스로의 나약함을 알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회개하고 더 나아지겠다는 열망을 굳세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단지 주님의 도구일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1코린 3, 5-6) 이 가르침에서 우리가 반드시 서로 새겨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한없는 효용성’이란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세상을 구하기로 결심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 당신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앙을 가져야 하고, 또한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인간적 계산에 의해서도 결코 멈춰선 안 됩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이겨내기 위해 주님이 주신 과업에 우리 스스로를 투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노력이 새로운 길을 열어갈 것입니다. 하느님께 헌신하는 우리들 각자의 거룩함이야말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단 하나의 해결책입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여러분은 얘기할 겁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이상적인 것은 항상 수준이 높은 법이니까요. 하지만 딱히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플 때 딱 들어맞는 약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일의 경우엔 그렇지 않습니다. 특효약이 항상 있는 법입니다. 그 특효약은 바로 거룩한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당신이 제정하신 다른 성사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말과 행동으로 다시 말해봅시다. “주님,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는 당신의 섭리와 매일 주시는 당신의 도움이 제가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엄청난 기적을 일으켜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키워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을 밝혀주시고 우리의 의지를 굳세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무르십니다. 바로 그분께서 항상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강론을 시작한 이후로 항상 신자들께 주의를 드린 것이 있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잘못된 느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실제로 알게 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여러분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나 저나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룩하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영원무궁하신 분의 거룩한 부르심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에페 1,4) 우리는 특별히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개개인의 엄청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들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나약함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쓰임새가 큰 주님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닥쳐오는 유혹들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알게 해주는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생생하게 체험했기 때문에 낙담한다면, 그 순간이야말로 온전히, 그리고 순명하며 하느님 손길에 스스로를 내어드릴 때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을 만나 자선을 청했던 어떤 걸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걸인 앞에 멈춰 서서 그에게 다섯 도시의 지배권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걸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뒷걸음질 쳤습니다. 그리고 소릴 질렀죠. “저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대왕이 대답했습니다. “너는 꼭 너답게 내게 청했고, 나는 꼭 나답게 네게 주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깨닫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당신의 생명을 우리가 더불어 나눌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뒤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 편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실하고, 또한 충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이해하고 우리들 자신의 잘못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사랑과 자극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여러분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느끼는 좌절감마저도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하나의 기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허약함을 인정합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권능에 고백합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희망과 기쁨,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쓰길 원하신다는 강한 확신으로 일관돼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교회의 한 부분으로 여긴다면, 그리고 베드로라는 반석과 성령의 활동으로 우리 자신을 지탱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모든 순간의 작은 의무들을 완수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조금씩 씨를 뿌리면 우리의 곡식 창고는 넘쳐날 것입니다.

이 기도의 시간을 마쳐야 하겠습니다. 우리네 영혼의 친밀함 속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선하심을 맛볼 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과 피와 영과 신성(神性)으로 성체 안에서 당신 자신을 현존하게 하실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온 힘을 다해서 그분을 경배하십시오. 그분의 현존 안에서 여러분 사랑의 참된 봉헌을 새롭게 하십시오.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씀을 그분께 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애정 어린 당신 자비의 증거를 매일 우리에게 보여주심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영과 통교할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을 격려하십시오. 이 사랑의 신비가 저는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제 마음을 왕관으로 쓰고자 하시는 분, 바로 우리 주님께서 여기 계십니다. 제가 그분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한 결코 저를 떠나지 않으실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고 그분의 성체를 양식으로 삼으면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충실할 것이고, 그런 뒤에 천국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함께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1코린 15, 55,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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