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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하느님의 친구들»에 하느님의 사랑 → 하느님의 구속 사랑 항이 있음.

예수님께서 어떻게 당신 사랑을 끝까지 퍼부어 주셨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바오로 사도께서 다시 한 번 그 답을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자녀 여러분, 그 신비에 대한 놀라움과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그 신비로부터 배우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권능, 위엄, 아름다움, 무한한 조화, 위대하고 측량할 수 없는 부유함을 그리스도의 인성 뒤로 감추셨습니다. 전능하신 분의 영광은 당분간 빛을 잃었고, 이로써 우리 피조물은 구원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놀랍게도 그분은 베들레헴에서 갓난아기로 첫 모습을 드러내셨고, 그다음에는 다른 어린이들과 똑같은 어린이로, 나중에 성전에서는 똑똑하고 총명한 열두 살 아이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따르는 열광적인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선생님으로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사랑의 자취들을 조금만 성찰해 보아도, 우리의 영혼은 그분의 너그러우심에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 영혼은 마치 불 위에 놓여 있듯이 따끔하지만 부드러운 인도를 받아 여러 번이나 옹졸하고 이기적이었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자신을 낮추시어, 부족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요 당신의 형제로 승격시켜 주십니다. 그분과 달리, 여러분과 저는 종종 어리석게도 주님께 받은 선물과 재능을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할 근거라도 되듯이 자랑합니다. 우리가 해낸 몇몇 성공적인 노력들이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 양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1코린 4,7)

하느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또 낮추시는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신비를 묵상하고 하느님을 본받을 수 있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겸손 앞에서 교만한 인간의 허영과 무례함은 끔찍한 죄악으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모범과는 정반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이신 그분이 자신을 낮추셨는데, 인간은 자신이 진흙으로 만들어진 가엾은 피조물임을 망각한 채 허망한 자기애에 빠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을 드높이려고 합니다.

제 대학생 시절의 기억이 또다시 떠오릅니다. 그 얼마나 신앙적인 모습입니까! 전례 성가가 들려오고 향냄새가 퍼지며, 자신의 비참함을 상징하는 커다란 촛대를 든 수천 명의 남성들이 행렬을 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어린이와 같으며, 눈을 들어 아버지의 눈을 마주볼 수 없을 만큼 어린아이입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저버린 것이 얼마나 나쁘고 쓰라린지 보고 깨달아라”(예레 2,19). 다시는 이 세상 것들을 돌보느라 우리 주님을 저버리지 않도록 굳은 결심을 새롭게 합시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더 키우고, 일상 행위를 위한 구체적인 결심을 합시다. 어린이와 같이 되어,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필요한지 깨닫고 하느님 아버지를 바라보며 외치는 사람들이 됩시다.

이제, 제가 예전에 이야기하였던 것으로 되돌아갑니다. 우리는 어린이와 같이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이러한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본성적으로 나약하지만, “믿음을 굳건히 하여”(1베드 5,9) 선행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어떠한 실수로 극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하더라도, 결코 주저하지 않고 다시 하느님 자녀의 길로 되돌아가서 언제나 두 팔을 벌리고 계신 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팔을 기억하십니까? 아마도 아버지의 팔은 어머니의 그것처럼 편안하고 부드럽게 감싸 안아 주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억세고 힘센 아버지의 팔은 우리를 꽉 붙들어 안전하고 훈훈하게 지켜 주었습니다. 주님, 그 강력한 팔과 튼튼한 손에 감사드립니다. 그 강인하고도 부드러운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제 잘못들에 대해서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 잘못들을 바라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해해 주시고 변호해 주시고 또 용서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지혜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영’(zero)에 불과하지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 역시 가엾은 사람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상상하며 그분처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합니다! 양심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결심하고 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게 됩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쉽게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순박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인간사에서, 심지어는 불행히도 교회 안에서도, 그와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침묵하라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일치를 깨는 말, 인신공격, 불의와 중상모략과 음모를 꾸미는 말을 지루하게 늘어놓을 것입니다. 이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올바른 해결 방안을 찾아봅시다. 우리가 해볼 수 있는 방안으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냉대를 하지 않고, 어떤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때에도 모욕을 주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겨우 몇 년이 지난 뒤, 사도들의 대부분이 여전히 살아 활동하고 있었고 놀라운 믿음과 희망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이 길을 잃고 주님의 사랑을 본받는 데 실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분열을 없애시려고 오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일고 있는데, 여러분을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이는 ‘나는 바오로 편이다.’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폴로 편이다.’ 하고 있으니, 여러분을 속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1코린 3,3-5).

바오로 사도는 다양성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은 하느님께 저마다 고유한 은사, 곧 이 사람은 이런 은사, 저 사람은 저런 은사를 받습니다(1코린 7,7 참조). 그러나 이러한 차이들은 교회의 선익에 봉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 당장 우리 주님께 교회를 주름지게 만드는 무자비함이 교회 안에 싹트지 않도록 간절히 청하고 싶습니다(여러분도 원한다면 저의 기도에 동참해도 좋습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 사도직의 소금입니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어떻게 세상을 향하여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라고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성 바오로 사도와 더불어 거듭 이야기합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1-3).

성체와 성혈의 성사를 약속하시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어떤 제자들은 투덜거렸습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도 어떤 사람들은 똑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묘사한 사랑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인류애, 인본주의 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와 동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향주덕의 실천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하여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8, 13).

확신하건대,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 덕목인 이 사랑은 때때로 익살스럽게 풍자되어 온 내용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그토록 끊임없이 선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사랑은 단지 선포해야 하는 주제일 뿐이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주위를 둘러본다면, 사랑은 단지 환상 속의 덕목일 뿐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자연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메마름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이고 강렬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영혼들 안에서 사랑이라는 첫 열매를 맺으시는 성령의 활동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갈라 6,2)라는 성 바오로 사도의 충고 말씀에 대하여, 교회 교부들 가운데 한 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선행이 미흡하여 아직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나약함을 쉽게 견딜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 안에서 자라게 하여 준 그 길이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저만치 밀쳐놓고 인도적 활동이나 사회사업에 먼저 투신한다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 이웃의 환자를 돌보느라 그리스도를 외면하지 맙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환자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예수님께 여러분의 시선을 맞추십시오. 그분은 변함없이 하느님이시지만 우리를 섬기시고자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리 2,6-7 참조). 오직 그분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따라감으로써만 우리는 값어치 있는 이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받는 이와의 동일시, 결합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분의 헌신적인 삶, 한없는 사랑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희생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궁극적 선택의 자리에 세우십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격리된 삶을 사는 것과, 다른 이들을 섬기는 데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과의 대화를 마치면서 성 바오로 사도와 더불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도록 주님께 간청합시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7-39).

성경은 이 사랑에 대하여 열정적 찬가를 부릅니다.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 가지 못한답니다”(아가 8,7). 이 사랑이 마리아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하여 온 인류의 어머니가 될 만큼 풍요로워졌습니다. 이 동정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모든 자녀를 배려하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라고 하시며 아주 사소한 일도 세심하게 살피시는 지극히 아름다우신 성심은, 예수님을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게 한 처형자들의 지독한 잔인함과 포악함을 보면서 극도의 아픔을 겪으셨어야 했습니다. 성모님도 당신의 아드님처럼 사랑하시고 침묵하시며 용서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의 힘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