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5«하느님의 친구들»에 하느님의 사랑 → 인간을 해방하는 하느님의 사랑 항이 있음.

여기 계신 하느님 앞에서 다시 한 번 자문해 봅시다. “주님, 어째서 우리에게 이러한 힘을 주셨습니까? 어째서 우리에게 당신을 선택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저희가 이 힘을 좋은 곳에 사용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사도 9,6 참조) 그분의 대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자유는 진리에 봉사할 때에만, 또 온갖 유형의 노예 상태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추구할 때에만 진정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스도교의 무궁무진한 보화, 곧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로마 8,21)를 사방에 선포하고픈 저의 열망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갑니다. 이것이 ‘선의’의 본질적 의미이며, 이 ‘선의’로써 우리는 “악에서 구별해 낸 선을 추구”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근본적인 점에 관하여 묵상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양심상 지녀야 하는 책임을 통감하게 합니다. 우리를 위한 선택은 우리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면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의해서 선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은 부모님에게서 가톨릭 신앙을 물려받았고,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세례로 새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 초자연적 생명이 우리 영혼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생 내내 날마다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하느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순명에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태도 그대로 악마의 유혹들을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한처음에 인간을 만드신 분은 그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맡기셨다’(집회 15,14). 만일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누구도 익명 속에 파묻힐 수 없습니다. 각 사람은 주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며, 하느님의 친구로 살 것인지 아니면 적으로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생 동안 겪게 될 내적 투쟁의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사는 한, 우리는 결코 완전한 자유를 성취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자유를 향유하며, 이 자유로운 신앙 고백으로 온갖 내면적 강압 요인을 제거하는 첫걸음을 딛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강압적인 힘에 이끌려 그리스도에게 온 것이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라 폭력입니다. 우리는 마지못해 성당에 들어가고, 마지못해 제단으로 나아가며, 심지어 마지못해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오직 우리가 원할 때입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성을 제대로 사용한다면, 우리의 자유는 우리를 성당으로 이끌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부르시는 소리에 응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집주인은 초대받은 사람들이 하찮은 구실로 자신의 초대를 거절하였을 때, 자신의 종에게 말합니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라”(루카 14,23). 그런데 이것이 각 개인의 양심과 정당한 자유를 거스르는 폭력이요 강요일까요?

복음서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곰곰이 묵상해 본다면, 이 강요의 명령을 오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점잖게 우리를 초대하십니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주님의 강요는 어떠한 신체적·윤리적 폭력도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러기는커녕 그리스도의 모범이 지닌 매력을 보여 주는데, 이는 하느님이 그분의 권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지 보십시오. 그분은 사람을 가르치시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것은 즐기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사람을 당신께로 끌어당기시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있을 때에, 악은 해방이 아니라 속박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슬러 죄 짓는 사람은 그가 강요로부터 자유로운 그만큼 의지의 자유를 누리지만, 그는 더 이상 비난을 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를 잃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이 선호하는 대로 행동하였다고 하겠지만, 참된 자유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결정의 노예가 되었고, 하느님을 무시한 채 최악의 결정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면, 자유도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사랑이 아닌 그 어떤 것에도 속박을 거부합니다. 종교는, 동물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반항입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을 알 때까지는, 또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까지는 만족스럽지 않고 마음이 불안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자유롭게 해방된 반항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대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노예와 하느님의 자녀,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는 딜레마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교만의 노예, 관능의 노예, 이기심의 노예 가운데 우리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잘못된 선택으로 수많은 영혼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진리와 정의와 선의 길을 닦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저의 자유를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를 묶고 있던 수많은 사슬이 풀리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의미하고 터무니없는 일들, 사소한 욕망들에 신경을 쓰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값진 보물이요, ‘돼지들 앞에 던져서는 안 되는 진주’(마태 7,6 참조)인 자유를 우리는 전적으로 선행을 배우는 데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이사 1,17 참조).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의 방탕한 행동들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위축되거나 협박 또는 시기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히 이행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놀라운 용맹심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인간 존엄성의 충만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다른 곳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짐스러운 것이거나 어떤 한계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참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무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한 결정을 내릴 때에, 우리는 아무것도 잃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얻습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우리는 최고의 카드를 뽑았습니다. 만일 그것이 의심스럽다면, 우리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봅시다. 우리의 신앙이 보잘것없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거의 없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이 빈곤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그분의 어머니요 우리 어머니이신 분을 통해서 간청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자라나도록, 우리가 주님의 현존이 얼마나 달콤한지 맛볼 수 있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할 때에만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영원히 언제까지나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를 유배 보냈던 이곳으로 너희를 다시 데리고 오겠다”(예레 29,14).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노예 신분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가 불러 주는 사랑의 노래를 들으며 그 노래의 날개 위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압니다. 이 사랑의 노래를 듣는 우리는 결코 하느님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을 사는 새로운 방식, 거룩하고 초자연적이며 경이로운 방식입니다. 에스파냐 황금 세기에 회자되던 구절들처럼, 우리는 이 진리의 깊은 맛을 음미합니다. “나는 살아 있습니다. 아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사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갈라 2,20 참조)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긴 세월 동안 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친구들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우리는 전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봉사해야 하는 의무를 저버리지 맙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자유롭게, 곧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로마 8,21) 안에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갈라 5,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를 얻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