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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하느님의 친구들»에 하느님의 사랑 →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항이 있음.

이제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온 인류를 위한 골고타 구원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에 관하여, 그리고 진흙으로 만들어진 우리 가엾은 피조물을 향한 그분의 설명할 길 없는 사랑에 관하여 묵상하기에 특별히 알맞은 시기입니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재의 예식: 창세 3,19 참조). 사순 시기 첫날, 어머니인 교회는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잊지 말라고, 그리고 언젠가 때가 이르렀을 때 우리 몸은 시골길 발길질에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처럼 흩어지고 “햇볕에 버티지 못하는 안개처럼”(지혜 2,4) 사라지리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엄숙하게 상기시켜 드렸지만, 여러분에게 또 하나의 찬란한 진리, 곧 우리를 지탱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위대함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우리 주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을 조용히 성찰하십시오. 그로부터 우리는 한평생 묵상할 거리를 풍부하게 얻을 수 있으며, 더욱 관대하게 살아야겠다는 구체적이고 진지한 결심을 하게 될 것입니다. 결코 우리의 목표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과 저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고 고통을 겪으셨으며,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신’(1베드 2,21 참조)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목표입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이 우리 주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그 사람은 모세에게 계시된 가르침을 알고 있었으나 본질적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자신의 무익한 결의론 때문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입술을 여시어 그 율법 교사에게 차분하고 확실하게 대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다락방에 모여 있는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파스카 축제를 바로 앞두고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성심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불타올라 그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만일 여러분이 복음서의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다면, 제가 늘 권장하듯이 여러분 자신이 그 장면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인물처럼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많은 보통 사람들을 제가 압니다.) 여러분은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고, 마르타처럼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진지하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걱정을 예수님께 담대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루카 10,39-40 참조).

주님, 주님께서는 왜 그것을 새 계명이라고 부르십니까?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은 이미 구약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에 이 계명의 지평을 하느님다운 관대함으로 넓히셨음을 우리는 또한 기억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

그러나 주님, 다시 여쭙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 계명을 새롭다고 하십니까? 그날, 주님께서 십자가 제물이 되시기 몇 시간 전에 예루살렘까지 동행한, 비록 우리처럼 나약하고 가엾은 그 제자들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시던 중, 예전에는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사랑의 기준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도들은 주님을 얼마나 잘 이해했어야 했고,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얼마나 잘 몸소 보여 주었어야 했습니까!

주님의 메시지와 본보기는 분명하고 정확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20세기가 지난 지금, 저는 때때로 그것이 참으로 새로운 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계명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것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이기심 때문에 이러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내가 왜 나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어야 하나? 나는 나 자신을 돌보는 데에도 할 일이 너무 많아!”

그러한 태도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좋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똑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남기신 분명한 발자국을 진정으로 따르려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그들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 자신의 행위를 사랑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러한 태도는 여전히 매우 모자랍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이 기준을 장기적 목표나 평생에 걸친 투쟁의 최고 정점으로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그리스도교 정신의 징표로 천명하셨듯이, 그것은 출발점이고 또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구체적 결심을 하도록 거듭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강생하시어 인간 본성을 취하시고 모든 덕행의 본보기를 몸소 인류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표지를 설명하실 때에, ‘너희가 겸손하기 때문에’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지극히 순결하시고 아무런 흠도 없으신 어린양이십니다.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완전하고 흠 없는 거룩함에 손상을 입힐 수 없습니다(요한 8,46 참조).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가 순결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내 제자로 알려질 것이다.’라고 하지도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재화와는 완전히 떨어져 사셨습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요 주님이시지만, 그분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으셨습니다(마태 8,20 참조). 그렇지만 그분은 ‘너희가 재화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내 제자로 알려질 것이다.’라고 하지도 않으십니다.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기 전에 주님께서는 40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셨습니다(마태 4,2 참조). 그러나,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분은 ‘너희가 먹보요 술꾼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종으로 알려질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세대에 걸쳐 참된 그리스도인과 사도의 뚜렷한 표지는 다름 아닌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주님의 이 같은 말씀에 하느님의 자녀들은 언제나, 오늘날의 여러분과 저처럼, 깊은 감동을 받아 왔다는 사실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성령 안에서 놀라운 기적과 찬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주셨지만,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당신의 충실한 제자라는 증거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사도는 말년에 자신의 서한들 가운데 하나에서 이 거룩한 가르침을 따르도록 권고합니다. 이 탁월한 가르침이 여러분에게 감동을 주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랑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요한 사도는 형제적 사랑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1요한 3,1).

이 말씀과 동시에, 요한 사도는 우리의 양심을 향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민감해지도록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또한 우리는 이미 인간에 대한 아버지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의 증거를 받았다고 강조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요한 4,9).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는 그분과 결합하여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제가 즐겨 표현하듯이, 우리 마음을 기꺼이 바닥에 내려놓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부드럽게 밟고 지나가며 더욱 기쁜 마음으로 역경에 맞서도록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외아드님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기에 우리도 이렇게 행동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종류의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는 라틴어 단어 ‘dilectio’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단순히 애정의 느낌이 아님을 분명하게 이해시키고자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의지에 따른 확고한 결정을 뜻합니다. ‘dilectio’는 ‘선택’이라는 뜻을 지닌 ‘electio’에서 옵니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그리스도인에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 곧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차별도 없이 영혼들의 선익을 위한 일을 하기로 결심하는 것, 또 그들이 그 무엇보다도 최고의 선익인,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영혼들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촉구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우리가 먼저 가까이 다가갔는데 우리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인간적으로 매력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되갚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어렵더라도 온 마음으로 그들에게 봉사할 기회를 내팽개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그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dilectio’라는 사랑은 대상이 믿음의 형제들과, 특히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가까이서 일하는 사람들, 곧 부모, 배우자, 자녀, 형제자매, 친구, 동료, 이웃일 때에 훨씬 더 다정해집니다. 하느님을 향한, 그리고 하느님께 바탕을 둔 고귀하고 순수한 인간적 사랑인 이러한 애정이 없으면, 박애도 없을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 덕목인 이 사랑은 때때로 익살스럽게 풍자되어 온 내용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그토록 끊임없이 선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사랑은 단지 선포해야 하는 주제일 뿐이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주위를 둘러본다면, 사랑은 단지 환상 속의 덕목일 뿐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자연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메마름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이고 강렬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영혼들 안에서 사랑이라는 첫 열매를 맺으시는 성령의 활동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갈라 6,2)라는 성 바오로 사도의 충고 말씀에 대하여, 교회 교부들 가운데 한 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선행이 미흡하여 아직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나약함을 쉽게 견딜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 안에서 자라게 하여 준 그 길이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저만치 밀쳐놓고 인도적 활동이나 사회사업에 먼저 투신한다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 이웃의 환자를 돌보느라 그리스도를 외면하지 맙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환자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예수님께 여러분의 시선을 맞추십시오. 그분은 변함없이 하느님이시지만 우리를 섬기시고자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리 2,6-7 참조). 오직 그분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따라감으로써만 우리는 값어치 있는 이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받는 이와의 동일시, 결합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분의 헌신적인 삶, 한없는 사랑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희생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궁극적 선택의 자리에 세우십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격리된 삶을 사는 것과, 다른 이들을 섬기는 데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과의 대화를 마치면서 성 바오로 사도와 더불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도록 주님께 간청합시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7-39).

성경은 이 사랑에 대하여 열정적 찬가를 부릅니다.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 가지 못한답니다”(아가 8,7). 이 사랑이 마리아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하여 온 인류의 어머니가 될 만큼 풍요로워졌습니다. 이 동정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모든 자녀를 배려하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라고 하시며 아주 사소한 일도 세심하게 살피시는 지극히 아름다우신 성심은, 예수님을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게 한 처형자들의 지독한 잔인함과 포악함을 보면서 극도의 아픔을 겪으셨어야 했습니다. 성모님도 당신의 아드님처럼 사랑하시고 침묵하시며 용서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의 힘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