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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길»에 극기 → 육체적 고행 항이 있음.

내적 금욕. 그대가 감각의 금욕을 멸시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의 내적 금욕을 믿을 수 없습니다.

눈! 눈을 통해 많은 사악함이 영혼으로 들어옵니다. 다윗왕의 경우와 같은 그런 경험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대가 눈을 지킨다면 그대는 마음도 잘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 안에 ‘그대의 세계’를 갖고 다닌다면서 주위는 왜 두리번거립니까?

“영혼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는 적이며, 또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친구다”라던 누군가의 말은 과연 옳습니다.

그대와 나는, 하느님께 속한 그 사람의 평범한, 그러나 영웅적인 생애에 대해 읽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아침식사 때마다 수개월, 수년 동안 투쟁해온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 양심성찰 때 그는 어느 날은 이겼으며, 그 다음 날은 졌다고 스스로 평가해서 기록해두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버터를 바르지 않았다…. 나는 버터를 발랐다!” 

그대와 나도, 우리 버터의 ‘비극’으로 생활하기를.

엄격한 단식은 하느님을 매우 기쁘시게 해드리는 보속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 모두가 태만해졌습니다. 그대가 지도자의 동의 하에 자주 단식하는 것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상처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거기서 그대는 감각을 지키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그대는 내적생활을 하게 되고, 그대의 빚과 모든 사람의 빚을 갚기 위해 주님과 마리아님의 고통을 성부께 끊임없이 봉헌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작은 금욕도 없이 식탁에서 일어났다면, 그대는 그날 비신자처럼 식사를 한 셈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하느님께 헌신하고자 한다면 지성인이 되기에 앞서 기도를 통해 주님과 아주 깊이 일치해있는 영적인 사람이 돼야합니다. *여성은 지성인이 안되더라도 신중하면 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감각과 신체기능 하나 하나를 다 덮는, 보이지 않는 겉옷을 걸치고 다녀야 합니다.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 속죄하고, 속죄하고, 또 속죄하는 것.

* "내 앞에 두 개의 길이 보인다. 하나는 내가 공부해서 학자가 되는 것입니다.(나는 이 일이 가능하고 마음에 든다) 다른 하나는 나의 욕망을 희생하는 것이다. 무식한 사랑으로써가 아니라 신중하기만 하면 되는 길이다. 나의 길은 두 번째다. 하느님은 내가 성화를 이루어 하느님의 일을 하길 원하신다."
이 글을 호세마리아 성인이 1932년에 자신의 수첩에 적어놓은 내용이다. 성 호세마리아는 당신의 남성 우월적 시대적 배경에서도 결코 여성을 경멸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성들도 남성들과 독같이 사회적, 직업적인 면에서 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단지 '학자'나 '박사'가 되기 이전에 속죄와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결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여성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학자가 되기보다는 '신중한'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좋다고 믿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