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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하느님의 자녀됨를 주제로 하는 4 항이 있음.

우리는 이러한 유혹의 순간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태도로부터 배워야만 합니다. 그분은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 당연히 누려야 할 영광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으로서 마땅히 흠숭 받으셔야 했지만, 그분은 종의 모습을, 노예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영광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의 숭고함과 위대함을 결코 자신의 이익이나 인간적 야망을 위해 사용해선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모든 인간적 영광을 거절하시는 그분의 태도는 당신께 부여된 위대한 사명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그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드님으로서 수행해야 할 임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받으셨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이 당신의 사명을 이루도록 자애로운 보살핌으로 이끌어주십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시편2, 7-8)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를 온전히 흠숭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누구나 우리 주님의 사랑스런 돌봄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가 나를 따르기에 나 그를 구하여 주고, 그가 내 이름을 알기에 나 그를 들어 높이리라.” (시편 91,14)

아무리 놀라운 일들이라도 금방 잊어버리고 신비로운 사건도 곧 익숙해지는 인간의 이상한 능력은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 사순시기에 우리 모두 명심합시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피상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신과 같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매일의 일에 얽매여 바쁘고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온전히 하느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됨’은 기쁨 넘치는 진실이자, 우리를 위로해주는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됨’은 우리의 모든 영적 생활을 가득 채웁니다. 또한 하느님께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울러 우리의 내적 투쟁을 희망으로 넘치게 하며, 우리에게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어린아이의 단순함을 선사합니다. 덧붙여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 안에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이신 우리 아버지의 손길로부터 온 모든 것에 경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한가운데서 세상을 사랑하며 관상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에 교회전례는 아담의 죄가 인류의 삶에 끼친 영향을 돌이켜봅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선한 아들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거역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오 복된 탓이여(felix culpa)’라는 찬양의 메아리를 듣습니다. 사순시기가 끝나고 부활 성야 때 온 교회가 기쁨에 겨워 이 성가를 부를 것입니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평화를 다시 세우기 위해 당신의 외아드님을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외아드님이 인간을 죄에서 구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갈라 4,5) 이로써 우리가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삼위일체의 거룩한 친교를 더불어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새롭게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모든 피조물은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분은 피조물과 하느님 사이의 화해를 이뤄내셨던 것입니다.

지금은 참회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결코 부정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사순시기는 ‘하느님의 자녀됨’이라는 영성 안에서 지내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됨’이란 영성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것이며, 우리들 영혼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께 더 가까이 오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과 같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에페 5,1) 따라서 하느님께서 뜻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겸손하면서도 열렬하게 협력하십시오. 깨어진 것을 고치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며, 죄 많은 인간이 무질서하게 흩어놓은 것에게 다시 질서를 돌려주고, 길 잃은 것들을 제 갈 길로 인도하며, 모든 피조물의 거룩한 균형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뜻하신 목적입니다.

때때로 사순시기의 전례는 하느님을 저버린 인간의 결말을 강조함으로써 비극적인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마지막 말씀을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바로 당신의 구원과 자비로운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복음사가 요한 성인의 말씀을 오늘 다시 반복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1요한 3,1)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자녀이자,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의 형제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에 대해 요한은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 1,4)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고, 빛의 형제들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일부인 우리의 심장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불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강론을 멈추고 미사를 계속 집전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각자 생각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여러분 안에서 어떤 결심과 다짐을 북돋우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자기 헌신과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여러분은 이 투쟁이 초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요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본보기라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아울러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유혹 당하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한결 더 나은 영성 안에 머무를 수 있으며, 확실한 승리를 체감(體感)할 수 있게 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 승리자라고, 진정한 승리자인 하느님의 선한 자녀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복합시다. 저는 행복합니다. 사순시기가 요구하는 양심 성찰로 제 삶을 바라보면 행복해해선 안 되겠지만, 저는 그래도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다시 저를 찾고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여전히 제 아버지이심을 아는 까닭입니다.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빛과 은총의 도우심으로 여러분과 제가 확실히 태워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들을 태워버릴 것입니다. 또한 뿌리 뽑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들을 뿌리 뽑을 것이며, 포기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들을 포기할 것입니다.

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확실한 안내자가 있습니다. 우리에겐 그 안내자가 없어선 안 되며 또한 안내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실 것이며, 그리하여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고 우리를 정화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끌어안을 수 있고 그분과 함께 부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기쁨은 십자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조력자이며 죄인들의 피난처’이신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님이시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도록 당신의 아드님께 청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확신에 차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결심이 우리 마음에 일어나도록 해주소서.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 중 한 분이 외친 평화로 가득한 말씀을 우리들 영혼 깊이 들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오너라, 너희의 아버지께 돌아오너라” 그분이 너희를 기다리고 계시니.

성목요일의 기쁨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성체께 항상 불러드렸던 그 찬미가를 우리는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을까요? “입을 열어 찬양하세. 영광의 성체 신비. 세상 구원 이루시려 흘리신 성혈 신비. 강생하신 만민 임금. 당신 피 흘리셨네. 순결하신 동정녀가 낳으신 아드님이 구원을 이루셨네” 우리는 성체 안에 숨어 계신 우리 하느님을 열렬히 경배해야 합니다. 그분은 예수님 당신 자신입니다. 동정 성모님께 잉태되어 나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당신 생명을 내어주신 그분이신 것입니다. 창으로 당신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님은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 안에 받아 모시는 거룩한 잔치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수난을 새롭게 기억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미래의 영광을 약속받습니다. 교회 전례는 우리를 향한 주님 사랑의 역사의 정점(頂點)을 이렇게 몇 마디의 말씀으로 요약해왔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인간의 운명과 열망, 분투와 고통을 무관심하게 지켜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멀리 계신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 자녀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복되신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신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을 수 있게 하신 겁니다. 하늘에 계신 그분은 사랑 넘치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에 거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 지금도 우리를 당신께 친절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목요일에 우리가 느끼는 기쁨의 원천입니다. 창조주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이토록 사랑하심을 깨닫는 것이 바로 기쁨의 근원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심으로써 항상 우리 곁에 계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그때까지 주님께서 행하신 다른 모든 자비의 증거들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당신 자비의 새로운 증거로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리하신 이유 중 한 가지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그분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지만, 우리와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복되신 삼위일체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은총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려 주셨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세 1,26)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인간 개개인의 죄는 물론이고, 아담과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뻗친 원죄로부터 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인간의 영혼에 거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