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밭고랑»에는 하느님의 자녀됨를 주제로 하는 12 항이 있음.

그대는 제게 십자가를 지고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네,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 성스러운 봉인,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보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함께, 언제나 기쁨 가운데 길을 걷는 것입니다.

속이 좁은 사람, 성숙하지 못한 사람, 통찰력 없는 사람,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교적인 초자연적 수평선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은 되지 맙시다.

하느님과 담대함.

주님께서 항상 아버지나 어머니의 마음으로 당신을 잘 대해 주시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언제나 대모험을 꿈꾸던 당신은 훌륭한 사업, 당신을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사업에 참여하였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사도직에 힘씀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십시오.

그대를 위해서 편지 하나를 베껴놓습니다

“저는 복음서가 가르치는 겸손에 매료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중의 한 사람이 무의식중에 위축된 태도를 취하고, 그 결과 교회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에, 저 무신론의 작가가, 그리스도교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다…라고 말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확실히, 우리는 노예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녀 신분에까지 높여진 노예이므로, 정념(情念)의 노예와 같은 생활은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좋은 자녀가 되고 싶으면 매우 인간적이 되어야 합니다. 다만 천박하고 속된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계급의 선입견을 향유할 수 없는데, 그것은 그가 모든 사람의 문제들에 흥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문제들을 우리들의 구원자이신 분의 정의와 사랑을 가지고 해결하도록 돕기를 시도합니다.

“주님은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라고 그가 썼을 때 그 사도는 이미 그 점을 지적해냈습니다. 저는 그의 말을 이렇게 옮기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의 인종, 곧 하느님의 자녀라는 인종이 있을 뿐이다.

슬픔에 잠긴 삶의 방식과 기쁨에 찬 삶의 방법의 차이, 소심과 담대함의 차이, 신중하고 교활하고 ‘위선적인 태도’와 겉과 속이 다르지 않는 태도의 차이, 다시 말하면 속된 사람과 하느님 자녀들의 차이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줍시다.

하늘과 땅은 저 먼 지평선쯤에서 한몸을 이루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정말 한 몸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인 그대 마음 속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여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다인, 할례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 타국인, 야만인, 노예, 자유인 따위의 구별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전부로서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십니다.”

이 말들은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유효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민족, 종족, 계급, 나라··· 등의 차이는 없습니다. 우리들 하나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고, 우리는 서로 간에 우애있게 처신해야 합니다.

조용하고 균형잡힌 성격 불굴의 의지, 깊은 신앙과 열성적인 경건성: 이것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의 불가결한 특성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일 것. 이것이야말로 서로 참고 견딜 뿐 아니라 그것을 훨씬 뛰어넘기 위한 조건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친구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마찬가지로 영웅적인 행위가 요구될 때도, 일상 생활에서도 서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녀인 우리가 공격대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전투준비를 갖춘 군대처럼 어디서나 싸우는 것이 우리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