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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하느님의 영광를 주제로 하는 5 항이 있음.

우리는 이러한 유혹의 순간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태도로부터 배워야만 합니다. 그분은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 당연히 누려야 할 영광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으로서 마땅히 흠숭 받으셔야 했지만, 그분은 종의 모습을, 노예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영광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의 숭고함과 위대함을 결코 자신의 이익이나 인간적 야망을 위해 사용해선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모든 인간적 영광을 거절하시는 그분의 태도는 당신께 부여된 위대한 사명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그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드님으로서 수행해야 할 임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받으셨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이 당신의 사명을 이루도록 자애로운 보살핌으로 이끌어주십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시편2, 7-8)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를 온전히 흠숭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누구나 우리 주님의 사랑스런 돌봄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가 나를 따르기에 나 그를 구하여 주고, 그가 내 이름을 알기에 나 그를 들어 높이리라.” (시편 91,14)

그리스도교의 모든 전례가 그렇듯이 오늘의 전례 역시 평화를 기념합니다. 성지(聖枝)는 그 유구한 상징성으로 볼 때 창세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창세 8,10-11)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되고 또한 굳건해졌음을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 이시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전례는 신약 안에서 구약이 경이롭게 일치되고 결합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례를 통해 기쁨의 말씀을 읽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 어떻게 경배 받았는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히브리 아이들이 올리브 가지 손에 들고 주님을 맞으러 나가 외치는 환호소리 ‘하늘 높은 곳에 영광’”

예수님을 맞이하는 환호의 노래(歡呼頌)는 베들레헴에서 그분이 탄생하셨을 때 드렸던 환호송과 우리의 영혼 안에서 맞닿아 있습니다. 복음사가 루카 성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가실 때에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예수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이르시자, 제자들의 무리가 다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루카 19, 36-38)

땅에눈 평화 

하늘에는 평화… 하지만 우리는 땅을 보도록 합시다. 왜 이 세상에는 평화가 없을까요? 맞습니다. 정말 평화가 없습니다. 단지 ‘평화처럼 보이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두렵고 불안정한 상태의 타협으로 잠시 균형이 이뤄질 때 나타나는 겉치레식 평화만 존재할 뿐입니다. 심지어 교회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흰 예복을 찢는 듯한 긴장이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세속적 활동에 몰입함으로써 영혼의 불안을 감추려 합니다. 결코 그들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들로 얄팍한 만족을 얻고자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슬픈 뒷맛만을 남길 뿐입니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평화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지(聖枝)는 경배를 상징합니다. 성지(聖枝)가 승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세상을 이기시는 순간에 와 계십니다. 십자가의 표징 아래서 그분은 죽음의 왕자인 악마에게 승리하시려는 순간에 와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이 승리자이신 까닭입니다. 싸우셨기 때문에 그분은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싸움은 인간의 마음속에 가득한 악마와 대결하는 힘겨운 투쟁이었습니다.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길’이십니다. 우리가 평화를 찾고자 한다면 그분의 발자국을 따라가야 합니다. 평화는 전쟁과 투쟁의 결과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이뤄지는 수덕적(修德的) 투쟁의 결실입니다. ‘수덕적 투쟁’이란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무관한 자기 삶의 모든 것들과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한 교만과 육욕, 이기심과 천박함, 그리고 비열함을 이겨내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인간의 양심에, 그들 영혼의 중심에 평온이 없다면, 밖에서 외적인 평온을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오기” (마태 15,19) 때문입니다.

거룩한 미사에 “온전히 참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기도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미사야말로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란 사실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확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리 죄를 씻고, 우리가 정화되며,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경험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하나 됨을 체험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느님 사랑의 위대하심에 응답할 수 있을지, 아마도 한두 번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을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명료하게 설명한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보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답은 간단합니다. 모든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애정을 다해 미사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깊게 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요약한 희생제사, 미사성제 안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미사 때 계속 이어지는 기도에서, 그리고 여러분 눈앞에 펼쳐지는 행동에서, 그 수많은 경우에 여러분이 보아온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립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다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 삶의 여러 모습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 모습들 가운데는 우리가 개선해야 하는 것들이 있고, 우리가 이겨내야 하는 악덕(惡德)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를 생각하며 우리가 발전시켜야 할 형제적 태도도 있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제대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우리의 청춘에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의 제대입니다. 미사는 기쁨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그리스도와 모든 성인들의 상징인 제대에 입을 맞출 때에 사랑, 감사, 그리고 기쁨이 드러납니다. 제대는 작은 평상(平床)이지만 거룩하게 마련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무한한 가치를 지닌 성사가 우리 앞에서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참회’는 우리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죄를 추상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죄와 연약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Kyrie, eleison, Christe, eleison)” 라고 반복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공로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면, 쓰라린 슬픔을 맛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자비로 인해 우리는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대영광송(Gloria)’이 바로 그것입니다.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시나이다.”

기도하는 삶 

“내 생명의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네.”(시편 42,9) 만약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살아계시는 존재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기도와 한데 엮여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나 기도란 한 번 드린 뒤에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이를 밤낮으로 되새기는” 의로운 사람이 돼야 합니다. “밤새도록 당신을 묵상하며 제 기도가 저녁에 드리는 분향과 같기를 바랍니다.” 밤부터 아침까지, 또 아침부터 밤까지 우리의 하루 전체가 기도를 위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잠조차도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일깨워줍니다.

예수님에 관해 복음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때때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와 친밀한 대화를 하시면서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사랑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스승님이 항상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나서 그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바오로 성인은 “기도에 전념” (로마 12,12) 하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하면서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본보기를 널리 전파했습니다. 루카 성인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마치 예술가가 붓으로 그린 듯한 문구로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사도 1,14)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훈련장에서 은총의 도움으로 활력을 얻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양식인 기도는 한 가지 형식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기도의 통상적인 표현을 말씀에서, 또는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셨거나 주님의 천사들과 성모님이 가르쳐주신 염경기도(念經祈禱)에서 찾아낼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에 우리는 수많은 신앙의 형제들이 신심을 표현했던 유구한 언어들을 사용하기도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전례에 사용하는 기도문(lex orandi)이나, 또는 ‘천주의 성모여, 기억하소서’, ‘하례드리나이다, 여왕이시여’(Sub tuum praesidium, Memorare, Salve, Regina)’ 등 성모님께 드리는 교창(交唱)처럼 열절한 사랑을 표현한 기도들도 있습니다.

또 다른 경우,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두세 단어로 함축해 화살처럼 빨리 드리는 기도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배우게 된 화살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 8,2)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요한 21,17)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마르 9,23) 이 기도는 제 신앙을 강하게 해줍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마태 8,8)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28)… 이 밖에도 사랑으로 가득한 짧은 문구들이 있습니다. 이 기도문들은 우리 영혼의 심오한 열정으로부터 솟아나 매일매일의 다른 여러 환경들에도 합치하는 것들입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의 기도 생활은 오직 하느님과의 대화를 위해 바쳐진 순간들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2천 년 동안 우리를 기다려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기 위해 가능하면 감실 앞에서 홀로 드리는 고요한 대화의 순간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가슴으로 나누는 대화를 ‘묵상기도(默想祈禱)’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혼 전체가 그 기도에 참여합니다. 우리의 지성과 상상력과, 기억과 의지가 모두 기도 안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매일 다반사로 반복되는 일상에도 불구하고 이 기도는 우리네 가난한 인간적 삶에 초자연적 가치를 부여하도록 돕는 묵상인 것입니다.

이런 묵상의 순간들과 소리 내어 올리는 우리의 염경기도(念經祈禱), 그리고 화살기도들 덕분에 우리는 하루 종일 하느님께 끝없는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겉보기에 치우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항상 서로를 생각하고 있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행동은 영적인 효과로 넘쳐날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방해받지 않고 주님과 친교를 맺기 시작할 때 그의 내적 삶이 성장해 굳세고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수행하기 위해 고되지만 매력적인 분투를 하게 됩니다. 덧붙여 말씀드립니다만, 이것은 선택받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가는 길이 결코 아닙니다. 이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기도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의 다른 측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도직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임무를 수행하는 일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 1,8)

우리 영혼을 다스리시는 주님 

우리 주님, 우리 하느님은 얼마나 위대하신지요! 우리 삶에 초자연적인 의미와 거룩한 생명력을 주시는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당신 아드님의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존재, 영육 간의 모든 것을 걸고 우리가 이렇게 말하도록 하십니다. “그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참으로 나약한 우리들이지만, 우리는 “그분께서 다스리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당신께서는 우리가 진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피조물들입니다. 우리는 발에 묻은 진흙에 지나지 않지만, 마음과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선,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다스리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내가 네 안에서 다스리기 위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하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저는 당신의 은총이 절실하다고 답하겠습니다. 오직 당신의 은총이 있어야만 제 모든 심장 박동과 호흡, 그리고 최소한의 진지한 시선과 가장 평범한 제 언어들과 기본적인 제 감정이 저의 임금이신 그리스도께 드리는 찬미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임금으로 모시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들 자신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우리 마음을 드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공허한 노릇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에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요소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존재하지도 않는 신앙을 겉치레로만 보여주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잘못 쓰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저나 여러분이 완벽해야만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을 다스리신다면, 우리는 정말로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딸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오신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요한 12,15)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시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비천한 동물을 왕좌(王座)로 쓰십니다.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의 눈에 제가 한 마리의 당나귀로, 짐승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저는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 앞에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늘 당신과 함께 있어 당신께서 제 오른손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시편 73,22-23) 예수님 당신께서 제 고삐를 쥐셨습니다.

당나귀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그 짐승의 모습을 한 번 떠올려보십시오. 난데없이 발길질을 해대는 늙고 고집스럽고 고약한 당나귀 말고, 귀가 안테나처럼 쫑긋한 어린 당나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녀석은 많이 먹지 않고 힘들게 일하며 잽싸고 경쾌하게 걷습니다. 더 말쑥하고 날래고 힘센 동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군중의 환호에 답하시며 임금으로서 백성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분이 택하신 동물은 당나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활한 사람들과 냉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겉으로는 매력적이지만 공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십니다. 그분이 좋아하시는 것은 젊은 마음, 소박한 발걸음,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지니는 활달함, 그리고 당신의 애정 어린 충고에 주목하는 맑은 눈동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다스리시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