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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유혹를 주제로 하는 5 항이 있음.

그리스도께서 유혹 받으시다 

사순시기는 당신의 공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보내신 40일을 기리는 기간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로 절정을 맞이할 주님의 공생활을 준비하신 광야의 시기를 기념하는 것이지요. 40일의 사순시기는 기도와 참회의 기간입니다. 끝으로 전례에 따른 오늘의 복음 말씀을 떠올려 봅시다. 바로 그리스도의 유혹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인간이 감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유혹을 받으시고, 악(惡)이 멋대로 설치게 놔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청하면서 이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혹 당하시다… 전통적으로 광야에서 겪은 그리스도의 시련을 이런 식으로 바라봅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의 모범이 되신 주님께서는 유혹에 시달리는 일 또한 스스로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죄가 없다는 것 말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완벽한 인간이므로 우리와 똑같이 유혹 받으시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마도 약초와 풀뿌리 조금, 그리고 약간의 물 말고는 다른 어떤 음식물도 없이 40일간 금식하셨기에 예수님은 허기를 느끼셨을 겁니다. 보통의 인간들이 그렇듯 그분도 정말로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마가 돌멩이를 빵으로 바꿔보라고 제안할 때 예수님은 당신의 육신이 갈구하는 음식을 거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큰 유혹을 뿌리치십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당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의 거룩한 힘을 쓰라는 유혹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보면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어떻게 일으키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카나의 결혼식에서 축하객들을 위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배고픈 군중을 위해 빵과 물고기를 많아지게 하십니다. 그렇지만 당신 자신은 수년간 스스로 일을 하셔서 생계를 꾸리십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땅을 돌아다니며 공생활을 하시는 중에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활하십니다.

복음사가 요한 성인은 긴 여행을 하신 뒤 예수님께서 ‘시카르’의 우물에 도착하셨을 때 제자들을 고을로 보내 먹을 것을 사오게 하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이 오는 것을 보자 예수님은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부탁하는 방법 말고는 물을 얻을 길이 없었던 겁니다. 오래 길을 걷느라 지친 당신의 육신이 피곤을 느끼신 것입니다. 다른 경우였다면 그분은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잠을 청해야 하셨겠죠. 당신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셔서 인간의 육체적 상태를 온전히 받아들이시는 우리 주님은 얼마나 너그러우십니까! 그분은 자신의 고충이나 노고를 피하기 위해 당신의 거룩한 힘을 절대 쓰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우리가 강인해지도록, 우리가 우리의 일을 사랑하도록,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노력한 결과를 음미할 수 있는 인간적이면서도 거룩한 고귀함을 깨닫도록 말입니다.

두 번째 유혹에서 악마는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권능을 사용하라는 악마의 제안을 다시 한번 거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겉으로 드러내는 허영(虛榮)을 좇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자신의 장점을 내보이는 배경으로 하느님을 이용해선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셨지만, 하느님의 계획을 미리 예상하지도, 기적의 시기를 앞당기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오직 인간의 고된 길을, 십자가로 나아가는 사랑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셨을 뿐입니다.

세 번째 유혹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왕국과 권력과 명예를 제안받습니다. 악마는 이제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야 할 신심(信心)마저도 인간의 야욕으로 돌리기 위해 열을 올립니다. 이렇게 악마는 편안한 삶을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우리가 악마 앞에, 우상 앞에 무릎 꿇기만 하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참으로 경배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느님뿐이라고 역설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만을 섬기겠다는 당신의 다짐을 명확히 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마태 4,10)

우리는 이러한 유혹의 순간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태도로부터 배워야만 합니다. 그분은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 당연히 누려야 할 영광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으로서 마땅히 흠숭 받으셔야 했지만, 그분은 종의 모습을, 노예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영광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의 숭고함과 위대함을 결코 자신의 이익이나 인간적 야망을 위해 사용해선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모든 인간적 영광을 거절하시는 그분의 태도는 당신께 부여된 위대한 사명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그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드님으로서 수행해야 할 임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받으셨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이 당신의 사명을 이루도록 자애로운 보살핌으로 이끌어주십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시편2, 7-8)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를 온전히 흠숭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누구나 우리 주님의 사랑스런 돌봄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가 나를 따르기에 나 그를 구하여 주고, 그가 내 이름을 알기에 나 그를 들어 높이리라.” (시편 91,14)

예수님께서는 어둠의 왕자인 악마에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곧바로 밝아집니다.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마태 4,11). 예수님께서는 시험에서 이기셨습니다. 그것은 진짜 시험이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 성인은 광야의 유혹이 진짜 시험이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으로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권능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분이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힘을 쓰셨다면, 광야에서 유혹 받으신 사건이 무슨 본보기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는 도움만을 쓰셨던 것입니다.”

악마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왜곡해 인용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시편 91,11)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를 시험하려는 유혹을 거부하십니다. 그리고 악마가 왜곡해 인용한 성경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러한 충실함의 보답으로 때가 되자 아버지 하느님의 사역자들(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악마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사용한 유혹의 방법은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악마는 성경 말씀의 의미를 불경하게 왜곡해서 그 문구들을 가지고 언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속지 않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기록된 것이지 인간을 혼란에 빠뜨려 타락하게 하려고 쓰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한 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악마처럼 성경 말씀을 조작하는 그런 짓거리에 아무도 속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짓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악마가 저지르는 전형적인 수법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지혜의 말씀을 거짓으로 속이고 빛을 어둠으로 바꾸려는 수작인 것이죠.

예수님의 삶에서 이렇게 천사가 등장하는 순간을 한번 살펴봅시다. 그러면 모든 인간의 삶에 있어서 천사가 하는 역할, 즉 그들 천사의 사명에 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수호자인 천사들을 ‘강력한 친구들’이라고 묘사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가는 데 동행해주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배정해주신 존재들인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들과 친구가 되라고 이끄시며,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도와주게 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삶의 행적들을 묵상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죄와 비참함, 그리고 정화의 절실함을 깨닫는 이 사순시기에도 기쁨의 여지가 존재함을 일깨워줍니다. 사순시기는 용기의 시간인 동시에 기쁨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용기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며, 당신의 천사를 우리에게 보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은 우리 인생 여정의 동반자가 되고, 길을 가는 내내 세심한 조언자가 되며, 우리가 맡은 모든 일의 협력자가 될 것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천사들에 관해 노래합니다.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시편 91,12)

우리는 천사들에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 천사들에게 의지하십시오. 당신의 수호천사들에게 얘기하십시오. 사순시기에 주시는 이 영성의 물결이 여러분의 영혼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영혼 깊이 깃들게 해달라고 간청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가엾은 존재들이니까요. 또한 여러분의 선한 의지를 주님께 가져가 보여드리라고 천사들에게 부탁합시다. 마치 퇴비 더비에서 자라난 한 떨기 백합처럼 우리의 비천함을 뚫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라난 선한 의지를 주님께 가져다드리라고 말입니다. 거룩한 천사시여, 우리의 수호자시여, “싸움 중에 있는 저희를 보호하소서. 그래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 저희가 사라지지 않게 하소서.”

때때로 사순시기의 전례는 하느님을 저버린 인간의 결말을 강조함으로써 비극적인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마지막 말씀을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바로 당신의 구원과 자비로운 사랑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복음사가 요한 성인의 말씀을 오늘 다시 반복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1요한 3,1)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자녀이자,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의 형제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에 대해 요한은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 1,4)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고, 빛의 형제들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일부인 우리의 심장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불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강론을 멈추고 미사를 계속 집전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각자 생각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여러분 안에서 어떤 결심과 다짐을 북돋우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자기 헌신과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여러분은 이 투쟁이 초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요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본보기라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아울러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유혹 당하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한결 더 나은 영성 안에 머무를 수 있으며, 확실한 승리를 체감(體感)할 수 있게 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 승리자라고, 진정한 승리자인 하느님의 선한 자녀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복합시다. 저는 행복합니다. 사순시기가 요구하는 양심 성찰로 제 삶을 바라보면 행복해해선 안 되겠지만, 저는 그래도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다시 저를 찾고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여전히 제 아버지이심을 아는 까닭입니다.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빛과 은총의 도우심으로 여러분과 제가 확실히 태워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들을 태워버릴 것입니다. 또한 뿌리 뽑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들을 뿌리 뽑을 것이며, 포기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들을 포기할 것입니다.

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확실한 안내자가 있습니다. 우리에겐 그 안내자가 없어선 안 되며 또한 안내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실 것이며, 그리하여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고 우리를 정화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끌어안을 수 있고 그분과 함께 부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기쁨은 십자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조력자이며 죄인들의 피난처’이신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님이시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도록 당신의 아드님께 청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확신에 차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결심이 우리 마음에 일어나도록 해주소서.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 중 한 분이 외친 평화로 가득한 말씀을 우리들 영혼 깊이 들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오너라, 너희의 아버지께 돌아오너라” 그분이 너희를 기다리고 계시니.

끊임없는 투쟁 

그리스도인의 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내적 삶이란 끝없이 다시 시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투쟁은, 우리가 이미 완벽하다는 교만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우리를 막아줍니다. 우리네 삶의 여정에서 온갖 어려움과 마주하는 일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장애물들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과 피로 만들어진 피조물일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살과 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런 장애물들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를 주저앉히는 욕정과 만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파괴적인 충동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육(靈肉) 안에서 교만과 육욕, 시기와 나태, 그리고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의 바늘을 발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개개인의 경험을 통해 증명된 우리 삶의 실상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런 요인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버지의 집으로 달려가는 이 은밀한 경기에서 이기는 출발점이자 정상적인 흐름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1코린 9,26-27)

이런 투쟁을 시작하거나 또는 계속해나가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외적 징표를 기다려선 안 됩니다. 내적으로 좋은 감정이 일어나길 기다려서도 안 됩니다. 내적 삶이란 감정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 있으며, 기꺼이 스스로 하려는 의지와 사랑에 좌우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승리의 날에 모든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치욕의 순간에는 그들 중 거의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사랑을 하려면 강하고 성실해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심장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굳건히 닻을 내려야 합니다. 변덕스럽고 피상적인 사람들만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랑의 대상을 바꾸는 법입니다. 그렇게 쉽사리 바뀌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좇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하며 스스로를 포기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고통스러운 난관을 헤쳐가는 자기 부정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기쁨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무엇도, 어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고해성사 안에서 회개하고 개선하겠다는 결심을 하며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그렇게 우리가 이 사랑의 모험을 하는 동안에는 스스로의 타락 때문에 낙담하지 맙시다. 그 타락의 정도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풀이 죽어선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착한 행동의 기록만을 모으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수집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직하고 충실한 요한에게 감동을 받으셨지만, 잘못을 저지른 뒤 뉘우친 베드로에게도 똑같이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끌어당겨 당신께 갈 수밖에 없도록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루하루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을 만나시려고 엠마오로 직접 오신 것처럼 그분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분은 토마스를 찾아오셔서 자신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그에게 만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우리가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약점을 알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