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밭고랑»에는 유혹를 주제로 하는 12 항이 있음.

그대는 유혹에 빠져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고 눈과 상상을 희롱하며 바보같은 수다를 떱니다. 그런 뒤 의심과 소심, 당혹, 슬픔, 낙담에 사로잡혀 놀랍니다.

일관된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처음의 열성이 있은 후에 동요와 망설임,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공부, 가족, 경제적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대가 그 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는, 아마도 그대는 쓸모가 없으리라는, 그대는 인생에 경험이 없다는 생각으로 걱정합니다.

제가 그대에게 그러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확실한 방법을 드리겠습니다.

악마의 유혹이거나 관용의 결핍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런 두려움을 극복할 확실한 방법을 알려주겠습니다. 그것은 ‘무시하기’, 그러한 생각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벌써 2천년도 전에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점을 알려주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죄에 대한 진정한 혐오감을 가슴 속에 키워야 합니다. 주님, 이제 결단코 당신을 모욕하는 일이 없기를 제가 다시는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되기를 바라옵니다!

그대의 초라한 육체와 인간적인 정욕의 부담을 느껴도 놀라지 마십시오. 지금에서야 “이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다니, 어리석고 천진한 아이가 아닙니까? 그대의 비열함은 장애물이 아니라 더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기 위한 자극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맑게 해주시는 것이니 말입니다.

만약에 당신 자신에 관한 생각들로 그대의 상상력이 넘쳐 흘러서 정상적으로는 그대의 도리에 어울리지 못할 환상적인 상황들과 환경들을 창출해 낸다면, 어리석게도 당신의 마음을 빗나가게 하고, 차갑게 해,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갈라놓을 것입니다. 이것이 허영입니다.

만약에 그대의 상상력이 남을 중심으로 돌아가면 그럴 사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남을 심판하는 결점에 빠져들 것입니다. 또한 남의 행동에 대해 객관적이지도 않고 비열한 해석을 내리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경솔한 판단입니다.

만약에 그대의 상상력이 당신 자신의 재능이나 말투, 혹은 다른 이가 그대에게 감탄하게 만드는 일에 집중된다면 강직한 의도를 잃고 자만심을 조장할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상상을 풀어헤치면 시간 낭비가 되고 상상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연이은 유혹에게 문을 열어 놓는 셈입니다.

단 하루도 내적 금욕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소명에 꿋꿋하게 대응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유혹들을 이겨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단순한 바보가 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살고 싶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심장이 멈춰줬으면 하는 바람과 같지 않습니까?

유혹과 대화하지 마십시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용기를 내어 도망치십시오. 그대가 어느 정도론 괜찮겠지 생각하고 약하게 대응하거나 장난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강해지십시오. 양보없이, 끊어 버리십시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쁜 건 당신입니다. 그런 독서, 그런 친구, 즉 그 길로 가면 절벽에서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그러한 것들이 그대의 발전에 도움이 되거나 인격을 원숙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겁니까.

비록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되고,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즐거움이 줄어들지라도 계획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십시오. 이제 책임 있는 사람에게 걸맞은 행동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고의의 작은 죄를 피하려 하지 않는 다수의 남녀의 무자각함이, 심하게 주님을 괴롭힙니다.누구나 이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통입니다, 라고 생각하고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예수님을 형에 처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그 군중도 대부분 다른 무리들처럼 처음엔 고함을 지르며 모두 올리브 동산으로 달려갔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는 일에 휘말려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인지,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20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는 아무것도 배우고 있지 않습니다.

떴다 가라앉았다 함. 당신은 올라가고 내려가는 기복이 너무 심합니다.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동안 그대는 편안한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내어주는 ‘바램’만 있는 상태와, 실제로 ’자신을 내어줌’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것 같습니다.

조만간 자신의 연약한 비참함을 깨달을 테니 몇 가지 유혹에 대해 미리 경고해 두고 싶습니다. 악마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내비칠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당신을 잊으셨다, 당신이 사도직에 불려간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세상의 괴로움과 죄의 무게는 사도로서의 당신의 힘을 초월했다라고.

즉시 그것들을 거부하십시오.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대가 정말로 싸우고 있다면 그대는 양심의 성찰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의 양심성찰을 신경써서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대하는 방법의 서투름을 깨달았을 때, ‘사랑’ 때문에 아픔을 느끼는지 어떤지 알아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초석’을 놓는 시공식으로 달려가도 그렇게 시작한 일이 끝까지 완성될지 여부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죄인들은 이것이 ’최후’, 이것으로 ‘끝’, 이라고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