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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사랑(애덕) → 향주덕 항이 있음.

인간적 사랑의 거룩함 

부부의 사랑은 순결하고 숭고하며 신성한 것입니다. 사제로서 저는 온 마음을 다해 이 사랑을 축복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하느님께서 결혼에 부여하신 가치를 확인합니다. 이와 관련해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성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인간 삶의 근원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 구세주께서 혼인잔치에 가셨습니다.”

결혼은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는 성사입니다. 신학은 “혼인성사의 주제가 남편과 아내의 몸”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이 같은 사실을 매우 강조해서 표현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나누는 사랑을 거룩하게 하시고, 또한 축복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결혼을 영혼의 결합일 뿐 아니라 육신의 결합이라고 여기십니다. 결혼의 소명을 받았건 아니건 간에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도 결혼의 가치를 과소평가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지으셨고 또한 지성을 부여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지성은 하느님의 지혜로부터 온 한 점 불꽃과도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선물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 덕분에 우리는 이해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몸 안에 출산의 능력을 심어주셨습니다. 이 능력을 통해 우리는 주님만이 가지신 창조의 권능에 동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에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의 몸을 키워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성(性)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성(性)은 생명과 사랑과 결실을 맺어주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선물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그리스도교의 성(性)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 땅에 존재하는 아름답고 고귀하며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들 중 그 어떤 것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간단명료하게 가르쳐줍니다. 우리들 삶의 규범이 결코 이기적인 쾌락의 추구가 돼선 안 된다고 말입니다. 오직 희생과 절제만이 진정한 사랑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진실하게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도록 초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은 다음과 같이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0,39)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오직 자기만족만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어려우며, 현세의 삶에서도 불행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줄 때만이 이 땅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결혼생활뿐만 아니라 삶의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얻는 행복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준비하고, 그 기쁨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생활이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기쁨이 있고, 가정을 꾸리고 돌보는 열망과 열정이 있으며,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 있고,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행복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슬픔과 고난이 동반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육신은 소진하고, 마음은 갈수록 쓰라리며, 겉보기에 항상 똑같은 날들이 단조롭게 이어지면서 인성(人性)이 위협받습니다.

그런 고난들에 직면했을 때 사랑과 기쁨이 끝나버렸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혼과 인간의 애정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닥쳐온 바로 그때 우리의 진짜 감정이 드러납니다. 바로 그때 자기를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과 다정한 심성이 뿌리를 내려 진실하고 깊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이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요셉 성인의 삶을 지탱해주며,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지켜주는 버팀목입니다. 요셉 성인의 헌신은 충직한 사랑과 사랑 넘치는 믿음, 그리고 믿어 의심치 않는 희망이 하나로 맺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 요셉 축일은 하느님께서 주신 그리스도교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약속을 새롭게 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믿음, 희망, 사랑으로 살고자 할 때, ‘여러분의 약속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무시하고 내버려뒀던 것을 다시 시작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새롭게 한다’는 것의 의미는 ‘하느님 손 안에 머무른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의 숱한 인간적인 잘못과 실수,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의 약속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에 대한 우리의 충실함을 확인하여 새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의 사랑을 행동으로 드러냄을 뜻합니다.

사랑에는 어느 정도 기준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사랑이 자기만족을 위한 충동이거나 자기 인격의 이기적인 충족을 위한 수단인 듯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런 건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기쁨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의 뿌리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희생과 고통 없이는 진정한 사랑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다가올 영원하고 충만한 삶에 도달할 때까지 사랑에는 희생과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고통은 달콤하고 사랑스러워집니다. 고통은 내적 기쁨의 원천이지만, 이것은 진짜 아픔입니다. 왜냐하면 저마다의 이기심을 이겨내고, 사랑을 우리들 각자의 원칙으로, 또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원칙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용서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2코린 6,1)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지 않는다면, 이 사순시기에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가득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선하게 해야 합니다. 참으로 변화를 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하느님의 은총을 가지고 장난칠 수 없습니다.

저는 두려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인류와 피조물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책임감에 대해, 진지함에 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롱당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갈라 6,7). 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결심해야 합니다. 성 미카엘 천사와 악마를 위해 두 개의 초에 모두 불을 밝히는 건 잘못된 일입니다. 악마를 위한 초는 꺼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님을 섬기는 데 써야 합니다. 거룩함을 향한 우리의 열망이 진심이라면, 하느님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길 만큼 우리가 충분히 유순하다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의 은총을 우리에게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회개를 위한 은총,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네 삶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시는 은총입니다. 특히 이 사순시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사순시기를 매번 반복되는 전례력 상의 다른 시기들과 똑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시기는 아주 특별한 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거룩한 도움을 주시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순간은 예수님께서 우리 곁을 지나가시면서 우리가 한 걸음 크게 앞으로 내딛길 소망하시는 시기인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코린 6,2) 우리는 다시 한번 착한 목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분은 다정하게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이사 43,1) 착한 목자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용하는 친근한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다정하심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우리가 당신을 반드시 볼 수 있는 길가에 서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만 아는 사실들에 관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우리만 아는 사실들이라 해도 모두 주님께 속한 것들이지만 말입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을 움직여 슬픔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관대해지도록 우리 양심을 열어주시며, 우리 스스로 충실해지기를 바라게끔 격려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당신의 제자들이라고 불릴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친밀한 은총의 말씀을 들을 때, 애정 어린 나무람으로 오시는 그 은총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셨음을 단번에 깨닫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당신을 보지 않았던 그 모든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당신의 마음속 그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2코린 6,2).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계속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영광과 당신의 사랑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그 영광과 사랑을 제때에 여러분에게 주십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으니 여러분은 주님께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오신 이 예수님의 사랑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할 것이며, 저는 또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구원의 날이 여기, 여러분 앞에 와있습니다. 착한 목자의 부르심이 우리에게 이르렀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이사 43,1) 사랑은 사랑으로 보답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1사무 3,9) 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저는 이 사순시기를 마치 바위 위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아무 흔적도 없이 흘려보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이 사순시기가 제 안에 스며들어 저를 바꾸게 할 것입니다. 저는 변화할 것이며, 다시 한번 주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그대로 주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태 22,37)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한 사랑 말고 여러분의 가슴에 남은 구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영혼에는요? 여러분의 마음에는요? 하느님께서는 ‘전부’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을 만드신 그분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것을 온전히 당신께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존경과 사랑 

처음에 우리는 날 때부터 눈먼 남자에 대한 예수님 제자들의 태도에 놀랐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나쁘게 생각하라, 그러면 네가 옳을 것이다”라는 불운속담(不運俗談)에 딱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그 후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으면서 사도들의 생각은 각자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점차 달라졌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필리2,3)

라고 말했는데, 이 말씀에 따르면,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길 수 있는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이 같은 영성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미덕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줍니다. 다른 사람의 명성과 성실과 사생활에 대한 존중의 표시는 겉으로 나타나는 관례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드러내는 첫 번째 표징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적이거나 금전적인 도움을 주는 데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유한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하기를 지향합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의 평판과 명예를 헐뜯는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하는 진리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어떤 경우건 그런 사람들에겐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똑같은 미덕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나누는 이 대화로부터 여러분이 실제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맙시다. 그들의 선한 의지를 의심하지 맙시다. 우리 주위에 돈독한 친교와 정의, 평화의 씨를 뿌림으로써 그 넘치는 선함 속에 악(惡)을 빠뜨려서 없애버리자고 다짐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올바른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받더라도 슬퍼하지 않기로 결심합시다. 우리 주님의 부단한 도움에 힘입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선한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잘못 해석되더라도 슬퍼하지 않겠다고 다짐합시다. 우리의 선한 일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동기(動機)를 부당하게 억측하면서 기뻐합니다. 또한 우리가 사악한 계획을 갖고 있으며 거짓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항상 용서합시다. 그리고 양심상 말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면, 악한 감정을 배제하고 명확하게 얘기합시다. 만약 우리가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는다면, 그 공격이 아무리 잔인하고 수치스럽더라도, 거룩한 침묵 안에서 -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물고 계셨다.” (마태 26,63) -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깁시다. 오직 선한 일을 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입시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선한 행동이 빛이 되어 “사람들 앞을 비추도록” (마태 5,16) 하실 것입니다.

끊임없는 투쟁 

그리스도인의 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내적 삶이란 끝없이 다시 시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투쟁은, 우리가 이미 완벽하다는 교만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우리를 막아줍니다. 우리네 삶의 여정에서 온갖 어려움과 마주하는 일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장애물들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과 피로 만들어진 피조물일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살과 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런 장애물들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를 주저앉히는 욕정과 만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파괴적인 충동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육(靈肉) 안에서 교만과 육욕, 시기와 나태, 그리고 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의 바늘을 발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개개인의 경험을 통해 증명된 우리 삶의 실상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런 요인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버지의 집으로 달려가는 이 은밀한 경기에서 이기는 출발점이자 정상적인 흐름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1코린 9,26-27)

이런 투쟁을 시작하거나 또는 계속해나가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외적 징표를 기다려선 안 됩니다. 내적으로 좋은 감정이 일어나길 기다려서도 안 됩니다. 내적 삶이란 감정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 있으며, 기꺼이 스스로 하려는 의지와 사랑에 좌우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승리의 날에 모든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치욕의 순간에는 그들 중 거의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사랑을 하려면 강하고 성실해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심장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굳건히 닻을 내려야 합니다. 변덕스럽고 피상적인 사람들만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랑의 대상을 바꾸는 법입니다. 그렇게 쉽사리 바뀌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좇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하며 스스로를 포기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고통스러운 난관을 헤쳐가는 자기 부정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기쁨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무엇도, 어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고해성사 안에서 회개하고 개선하겠다는 결심을 하며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그렇게 우리가 이 사랑의 모험을 하는 동안에는 스스로의 타락 때문에 낙담하지 맙시다. 그 타락의 정도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풀이 죽어선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착한 행동의 기록만을 모으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수집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직하고 충실한 요한에게 감동을 받으셨지만, 잘못을 저지른 뒤 뉘우친 베드로에게도 똑같이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끌어당겨 당신께 갈 수밖에 없도록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루하루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을 만나시려고 엠마오로 직접 오신 것처럼 그분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분은 토마스를 찾아오셔서 자신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그에게 만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우리가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약점을 알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