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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사랑(애덕) → 애덕의 특성 항이 있음.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들 마음속에서 당신의 쉴 곳을 찾고 계십니다. 저는 결코 진실을 왜곡하지 않고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그분께 각자의 무지함과 배은망덕함에 대한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가는 우리 영혼의 문을 스스로 닫아 버리지 않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권리를 요구하지 않고 섬기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어떻게 순종하셨을까요?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립 2,8) 여러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곤혹스러워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삶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조용한 삶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다르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뜻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여러분 스스로가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여러분의 뜻에 맞춰서 하느님의 뜻을 왜곡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요청하신 일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칩니다. 주님처럼 “죽음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저는 매우 기쁩니다. 그들은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또한 모두의 선익(善益)을 위해서 자신의 열망과 직업적 노동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순명(順命)을 배웁시다. 섬김을 배웁시다.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내어주며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원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리더십입니다. 우리 내부에 자만심이 커져서 우리가 뭐든 할 수 있는 슈퍼맨이란 생각을 하게 될 때, 그 순간이 바로 “아니요”라고 말할 때인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승리는 겸손의 승리일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마지못해 안절부절못하며, 시큰둥하게 하는 게 아니라, 아주 기쁘게 말입니다. 우리 자신을 잊을 때 찾아오는 기쁨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눈(眼)의 노약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던 그 남자의 대답이 제 마음속에 자주 떠오릅니다. 바리사이들이 그에게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여러 차례 물었지요.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요한 9,27)

바리사이들의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죄는 스스로를 자기 자신들 안에 가둬버린 데 있습니다. 자신을 걸어 잠금으로써 빛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바로 바리사이들의 죄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빛이어야 한다고 믿으며, 하느님께서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들은 부당하고 오만한 태도로 자기 이웃을 대할 것입니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도둑질하고 속이고 간음이나 하는 그들과 같지 않게 해주시고, 여기 있는 세리와도 같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요한 9,39-41)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한때 눈이 멀었던 그 남자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치유됐다고 진심으로 설명하지만, 바리사이들은 그를 모욕합니다.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요한 9, 34)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 중에도 정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스스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방법을 알며, 진실하고 친절하며 고상합니다. 만약 그들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닫힌 눈을 치료해주시는 것을 막지 않는다면, 그분의 손에서 치료약으로 변한 진흙을 우리에게 발라주시도록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참된 현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믿음의 빛으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거룩한 현실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지향점이 곧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소입니다. 우리는 사랑(愛德)으로 충만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1코린 13,4-7)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우리 이웃에 대한 친절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선(慈善)을 선호하는 경향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부어주신 것이고, 우리의 마음과 의지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사랑은, 우정을 나누고 옳은 일을 한 기쁨을 누리는 초자연적인 기반을 제공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불구자의 치료 장면을 묵상해봅시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는데 문 옆에 앉아 있는 불구자와 마주칩니다. 그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눈먼 남자의 치유와 흡사합니다. 하지만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불구자의 불행이 그의 죄 때문이거나 그 부모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그에게 말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사도 3,6) 이전에 제자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모욕했지만, 지금은 자비로 그를 대합니다. 이전에는 사람을 경멸하며 판단했지만, 지금은 주님의 이름으로 치유의 기적을 그에게 선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우리 곁을 지나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도와 제자들의 모습으로 이 세상의 거리와 광장들을 계속 지나가십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제 말씀을 듣고 계신 여러분의 영혼으로 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시기를 간구합니다.

‘예수 성심’께 대한 참된 공경 

“예수 성심”이라는 말 안에 담긴 풍성함에 대해 알아봅시다. 어떤 사람의 마음에 관해 얘기할 때 우리는 단순히 그 사람의 감정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대하는 ‘그 사람 전체’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성경은 ‘마음’이라는 표현을 곧잘 씁니다. ‘마음’이 담고 있는 모든 인간적 의미들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마음’은 한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한 요약이자 원전(原典)이며 표현인 동시에, 그 표현의 근거를 뜻합니다. 한 사람의 가치는 곧 그 마음의 가치인 것입니다.

마음이 기쁠 때 성경은 “제 마음 당신의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시편 13,6) 라고 합니다. 회개하는 마음은 “제 마음은 밀초와 같이 되어 속에서 녹아내립니다.” (시편 22,15), 하느님을 찬양하는 마음은 “아름다운 말이 제 마음에 넘쳐흐릅니다.” (시편 45,2), 주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결심은 “제 마음 든든합니다. 하느님” (시편 57,8) 그리고 사랑하며 경계하는 마음은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지요.”(아가 5,2)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또한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나를 믿어라.” (요한 14,1)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느낄 뿐 아니라 알아서 깨우치고 이해합니다. 하느님의 율법은 마음에 받아들여져서 그 마음에 새겨져 남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마태 12,34)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다음과 같이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마태 9,4) 그리고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를 한데 모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마태 15,19)

‘마음’에 관해 얘기할 때 성경은 기뻐하거나 눈물 흘리는 등의 떠도는 감정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마음이란 말은 존재 전체, 영혼과 육신의 갈 길을 정하는 ‘한 사람의 특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21)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스스로 좋다고 여기는 그대로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성심에 관해 얘기할 때,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확실함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헌신의 진실함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을 권할 때, 온전히 예수님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감정, 생각과 말과 행동, 그리고 우리의 기쁨까지 모든 것을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성심께 대한 진정한 공경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과 우리들 자신을 함께 아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격려하고 가르치고 이끄시도록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을 훼손할 수 있는 가장 천박한 요인은 ‘인간성이 결핍된 사람’입니다. 이는 강생하신 하느님의 실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모님 닮기 

우리의 어머니는 하느님 은총에 응답하는 본보기와 같은 분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성모님의 삶을 깊이 묵상한다면, 일상에서의 우리 존재를 거룩하게 하는 데 필요한 빛을 주님께서 내려주실 것입니다. 성모님께 봉헌된 축일들과 또 다른 날들을 기념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동정 마리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놓이셨다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상상해봅시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쓰며 그 순간들을 잘 활용한다면, 우리는 꾸준히 성장해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마치 아이들이 그들의 어머니를 닮듯이 우리도 성모님의 자녀로서 그분을 닮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성모님의 사랑을 닮읍시다. 사랑이란 그저 좋은 느낌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려면 우리의 대화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행동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합니다. 동정 성모님께서는 단순히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삶의 모든 순간에서 확고하면서도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을 하셨고 이를 수행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온전히 다 바쳐서 그분께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진실로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초자연적인 품위를 닮아야만 합니다. 그분은 구원의 역사에서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은 피조물이십니다. 왜냐하면 성모 마리아로 인하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기” (요한 1,14)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는 조용한 증인입니다. 당신 자신의 영광을 좇지 않으므로 칭찬받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어린 아드님을 둘러싼 신비에 언제나 함께하셨지만, 그러한 신비들은 말하자면 ‘평범한’ 신비입니다. 거대한 기적들이 일어나고 군중이 놀라 환호할 때 그분은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작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왕으로 추앙받으셨을 때 우리는 마리아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도망가 버린 뒤 성모님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 곁에 다시 나타나십니다. 성모님의 이러한 행동방식은 그분 개인의 위대함과 심오함, 그리고 영혼의 성스러움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그분의 모범에 따라 우리는 맹종하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게 하느님을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에게서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복종하는 어리석은 처녀의 태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주의 깊게 경청하며 자신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 물어보십니다. 그러고 나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온전히 헌신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복되신 동정녀, 모든 우리 행동의 스승께서는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은 굽신거리는 게 아니며, 우리 양심을 멀찍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내적으로 깊이 감화되어야만 하고, 그럼으로써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유를 발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