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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교회 →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계시다 항이 있음.

착한 목자이시고, 착한 인도자이신 분 

하느님의 부르심은 항상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 앞에서 별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별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별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오는 길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내적 삶의 어떤 순간에는 별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는 대부분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신 성소의 거룩한 광채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부르심이 무엇인지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우리들 자신의 고행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일으킨 먼지들이 투박한 구름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 구름이 우리 앞에 비추던 빛을 가렸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동방박사들을 본보기로 삼아 질문해봅시다. 헤로데는 자신의 지식을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는 데 써버렸습니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선한 일을 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헤로데에게 갈 필요도 없고, 세상의 현자들을 찾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명확한 가르침(교리)을 주셨고, 성사 안에서 넘치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인도하고 이끌어줄 사람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항상 되새겨주는 사람들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도록 주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우리에겐 또한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지혜의 보물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보전해온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사를 통해 베풀어지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그것입니다.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증언과 본보기 또한 지혜의 보물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선한 삶을 통해 하느님께 충실하게 나아가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께 충고 한 마디 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밝게 빛났던 빛을 잃어버린다면, 그때마다 착한 목자에게 의지하십시오. 그런데 누가 착한 목자일까요? 착한 목자는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 입니다. 그는 삯꾼처럼 행동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렇게 되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립니다.” (요한 10,1-12). 이 성경 말씀들을 되새겨보십시오. 결코 헛된 말이 아닙니다. 목자와 양들, 그리고 양의 우리와 양 떼에 관해 애정을 가득 담아 얘기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영혼에게 좋은 인도자가 필요하다는 실질적인 증거로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좋은 목자’에 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만약 나쁜 목자가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리를 보고 도망하는 삯꾼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쁜 목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닌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나쁜 목자는 영적 자유를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나무랄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이리는 양의 목을 물어 낚아채고, 사탄은 인간을 유혹해 불의를 범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침묵하며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삯꾼인 것입니다. 이리를 보고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니야, 나는 여기 있다고. 달아나지 않았어’… 하지만 저는 여러분께 대답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침묵했으니 달아난 것입니다. 두려웠기 때문에 여러분은 침묵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는 항상 풍성하게 많은 착한 목자들을 통해 스스로의 거룩함을 드러냈고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가 단순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둔해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하는 삯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얘기를 하는 삯꾼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착한 목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서조차 주님께서 우리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신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야말로 우리는 착한 목자에게 가야 하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당연히 우리 영혼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며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랑 넘치는 영혼이 되고자 합니다. 그 역시 죄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항상 그리스도의 용서와 자비를 믿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여러분의 양심이 말해준다면, 그 잘못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거나 잘못인지 아닌지 의심스럽더라도 고해성사를 드리러 가십시오. 여러분을 돌봐주는 사제를 찾아가십시오. 그는 굳건한 믿음과 영혼의 정화,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여러분에게 요청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적합한 자격을 갖춘 사제라면, 누구에게나 찾아가서 고백할 수 있는 엄청난 자유를 여러분에게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신중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완전한 자유의지로 자신이 착한 목자로 알고 있는 사제에게 갈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제는 여러분이 다시 한번 주님의 별을 올려다보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거룩한 은총의 성사들 

진실로 투쟁을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에서 절대 변하지 않은 유용한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고, 고행이고, 또한 자주 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행도 역시 기도지요. 육신의 감각으로 드리는 기도니까요. 그래서 추려보면, 이 방법은 두 단어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성사입니다.

이제 성사(聖事)에 관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성사는 하느님 은총의 근간입니다. 성사는 하느님의 사랑 넘치는 친절하심을 확인하는 경이로운 증거입니다. 트리엔트 공의회가 내린 교리의 정의를 조용히 묵상해봅시다. “성사란 은총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 은총을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고 선포하는 일종의 감각적인 징표이다.” 우리 주 하느님은 무한(無限)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다할 줄 모르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온화함과 다정하심은 한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그리고 무상으로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곱 개의 효과적인 징표를 세우셨습니다. 그 일곱 가지 징표(칠성사)는 안정감 넘치고 간단하며 쉬운 방법으로 인간이 구원의 공로를 나눌 수 있게 해줍니다.

만약 성사를 포기한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사에 대해 잊은 듯이 보이며, 성사라고 하는 이 그리스도 은총의 흐름을 비웃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른바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이러한 상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니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해야만 합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우리가 더욱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이들 성사의 원천에 다가서도록 용기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갓 태어난 자녀의 세례를 미루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정의와 사랑에 심각하게 맞서게 됩니다. 세례를 미루는 것은 신앙의 은총을 자녀들에게서 빼앗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죄로 얼룩진 세상에 태어난 한 영혼 안에 깃들어 계신 복된 삼위일체의 엄청난 보물을 앗아가는 까닭입니다. 아울러 그들은 견진성사의 참된 본질도 바꾸려 듭니다. 거룩한 성전(聖傳)은 이견 없이 견진성사를 영적 삶을 굳세게 해주는 성사로 받아들입니다. 견진성사는 더욱 많은 초자연적인 힘을 영혼에 부여합니다. 조용하면서도 풍요로운 성령의 강림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군대(milites Christi)’답게 싸울 수 있게 해줍니다. 그 싸움은 이기심과 온갖 유혹에 맞서는 스스로의 은밀한 전투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느님의 일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다면, 고해성사의 가치를 인정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인간과의 대화가 아닌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 정의(正義)의 법원(法院)인 동시에, 특히 하느님 자비의 법원입니다. 그 법원에는 사랑 넘치는 재판관이 계셔서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에제 33,11)

우리 주님의 다정하심은 정말로 무한합니다. 그분이 당신의 자녀들을 얼마나 친절하게 대하시는지 보십시오. 그분은 결혼을 거룩한 결합으로 만드셨고,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가 일치를 이루는 상징으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가정의 근간이 되는 위대한 성사로 만드셨습니다. 혼인성사로 이뤄진 그리스도인 가정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평화와 화합의 장소여야 하고, 또한 성덕(聖德)의 학교여야 합니다. 부모는 하느님의 협력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를 사랑해야 할 의무를 가집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썼던 것처럼, 부모를 사랑하라는 네 번째 계명을 십계명 중 가장 사랑 넘치는 계명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거룩하게 결혼생활을 한다면, 여러분의 집은 평화와 기쁨 가득한 밝고 즐거운 가정이 될 것입니다.

사제의 책임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목자들 스스로가 민감한 양심을 가지기 위해 분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신앙의 유산을 채워주고 교회의 모든 유산을 만들어 주는 교의(敎義)와 윤리적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해 그들이 분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에 대한 설명이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에제 34,2-4)

이 말씀은 매우 신랄한 질책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은 훨씬 더 나쁩니다. 하느님을 거스른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영적 안녕을 촉진해야 할 임무를 맡은 사람이 오히려 사람들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사람들에게서 영혼을 정화하는 세례수(洗禮水)를 빼앗게 되고, 영혼을 굳세게 하는 견진성사의 성유를 잃게 만듭니다. 또한 고해성사라고 하는 용서의 법원을 빼앗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평화를 위한 싸움(내적 투쟁)을 포기할 때 생겨나는 결과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사람은 육신에 얽매인 노예 상태에 스스로를 맡겨버리게 됩니다. 육신에 얽매인 노예 상태란 순전히 인간적인 사고방식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일순간에 불과한 영향력과 명성에 집착하는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허영심의 노예,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육욕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이런 시험을 겪게 그냥 놔두시고, 이름값 못하는 목자를 만나게 된다 해도 충격받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게 무류성(無謬性)과 확고함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의 충직함을 보장해주지는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느님께서 요구하신 작은 일을 한다면, 그들에게 주시는 은총이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거룩함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제거하고자 분투한다면, 풍부하고 풍성한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노력하지 않는다면, 설사 매우 높은 지위에 있는 듯이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눈에는 매우 낮은 자가 될 것입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나는 네가 한 일들이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묵시 3,1-3)

1세기에 요한 성인이 쓴 이 권고는 사르디스 교회의 책임자에게 전달됐습니다. 일부 목자들의 책임의식이 약해지는 것은 비단 오늘만의 현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셨던 바로 그 시기, 사도들의 시대에도 그런 상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분투를 그만둔다면 어느 누구라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아무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굳세게 하기 위한 특별한 방법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도움과 충고를 받아들이도록 해주는 겸손,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서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게 하는 고행,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보전하고 전파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견고하고 변치 않는 가르침에 대한 공부…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들 스스로를 굳세게 해주는 방법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다.” 이는 우리의 신앙을 의미 있게 가득 채우는 거대한 진리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분은 슬픔과 고통, 그리고 어둠의 힘을 이기셨습니다. 천사는 주님의 무덤에 온 여인들에게 “놀라지 마라”하고 인사했습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 계시지 않는다.” (마르 16,6)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시편 118,24-부활 대축일 미사 화답송)

부활절은 기쁨의 시간입니다. 이것은 전례력상의 이 시기에만 한정되는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가슴 속에 실제로 항상 충만한 기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떠나가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모범과 위대한 기억을 남겨주고, 잠시 계셨다가 사라져 버린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이십니다. 그분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저버리지 않으심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앞으로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거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 49,14-1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분의 기쁨은 사람의 아들들과 여전히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 안에 살아 계십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요한 16,7)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와 생명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 안에 머무르십니다. 교회의 성사 안에, 교회의 전례와 가르침 안에… 교회가 하는 모든 일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머무르십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매일 봉헌하는 성찬의 전례 안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사는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이자 원천입니다. 완전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머리와 지체(肢體)가 온전히 모든 미사에 현존하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Per Ipsum et cum Ipso et in Ipso)’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중재자이시고, 그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발견합니다. 그분 밖에서 우리의 삶은 공허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으로 “우리는 감히 ‘우리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히 하늘과 땅의 주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의 존재가 곧 이 세상에 계시는 당신 현존(現存)의 증거이며, 원천인 동시에 정점(頂點)입니다.

인간 활동의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 

가능한 일입니다. 공허한 꿈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이 마음 깊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하기만 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 높은 십자가로부터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것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요한 12,32-불가타 성경) 다시 말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매 순간 의무를 다함으로써 지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활동, 그것이 중요하게 보이거나 아니건 간에 그 중심에 나를 세운다면, 나는 모든 것을 내게로 이끌어 들일 것이다. 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현실로 이뤄질 것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인간을,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을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합니다. 하느님의 손으로 선하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담이 거역했습니다. 오만한 인간의 죄가 창조의 거룩한 조화를 깨뜨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때가 차자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셔서 성령으로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인간의 육신을 취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죄로부터 구원받음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갈라 4,5)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회복시킴으로써 온 우주가 무질서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고, 우리들 사도직의 과업이며, 우리 영혼을 사로잡아야 할 열망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현실로 만드는 것, 증오와 잔인성을 없애는 것, 온 세상에 강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향유를 퍼뜨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열망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임금님께 우리가 겸손하고 열정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합시다. 그래서 부서진 것들을 새로 고치고,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으며, 인간이 초래한 무질서를 바로잡고, 올곧은 길에서 벗어난 모든 이들에게 옳은 방향을 정해주며, 창조된 모든 것들의 조화를 회복시키는 하느님 사업을 위해 우리 모두 힘을 모으게 해달라고 부탁합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품어 안는다는 것은 사람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제2의 그리스도, 그리스도 자신 (Alter Christus, Ipse Christus)’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이 거대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찰나에 불과한 세상의 모든 구조(構造)들에게 구원의 누룩을 가져다줌으로써 그들을 내부로부터 거룩하게 만드는 일, 그 어마어마하고 끝없는 과업을 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에 관해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열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 종교운동’을 결성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런 운동들이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전파하겠다는 열망으로부터 비롯됐다 하더라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미친 짓일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그가 누구이건 간에 그들의 마음속에 하느님을 모셔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상황에서 스스로의 본보기와 언어를 통해 그들의 신앙을 증언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여기서 각자가 처한 상황이란 교회에서의 위치, 시민사회에서의 지위, 그리고 그들이 수행하는 일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살아갈 완벽한 권리를 가집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자기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사시게 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그는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효과를 눈에 띄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의 사회적 위치가 높건 낮건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성취로 보이는 것들이 하느님의 눈에는 아주 저급한 것일 수 있으며, 반대로 수준이 낮거나 별것 아니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들이 그리스도교의 언어로는 거룩함과 섬김의 정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