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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교회 → 성모님과 교회 항이 있음.

이번 오월 한 달 동안에는 이 세상을, 하느님의 백성들을 눈여겨봅시다. 그러면 오래된 형식으로, 또는 새로운 형식으로 다양하게 치러지는 수많은 유형의 성모 공경 행사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크나큰 사랑을 담아서 거행됩니다.

이러한 성모 공경 행사들이 언제나 생기 넘치며, 그리스도인들 마음에 “하느님의 한 가족 (domestici Dei)” (에페 2,19)으로 행동하겠다는 초자연적인 열망을 일깨워준다는 사실은 저를 매우 행복하게 합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정 마리아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보면, 여러분은 자신이 교회의 일원임을 보다 확실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형제 자매들과 더욱 가까운 느낌이 들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가족의 재회(再會) 같습니다. 따로 살던 장성한 자녀들이 어떤 가족 기념일을 맞아 어머니를 뵙기 위해 집에 돌아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설령 식구들 간에 잘 어울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날만큼은 달라지는 거죠. 서로 하나됨을 느끼고 가족으로서 똑같은 애정을 나누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끊임없이 교회를 세우시며 서로 함께하도록 돌보십니다. 성모님을 공경한다면 교회라는 신비체의 다른 구성원들을 더 가깝게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교회의 가시적인 지도자인 교황과 더욱 일치감을 갖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곧잘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모두 성모님을 통해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우리 스스로를 교회의 일부분으로 여기고 믿음 안에서 우리 형제들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가 모든 인류와 한 형제라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파견됐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경험이 우리의 성모님께 대한 진심 어린 공경의 효과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는 1935년 스페인의 ‘손솔레스 성모성지’를 방문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순례는 아니었습니다.

시끌벅적한 방문도 아니었고 무슨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성지에 갔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세 명이 일행의 전부였지요. 저는 성모님 공경을 위한 공식적인 행사들을 존중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혼자 또는 소수의 인원이 성지를 찾을 때도 공식적인 성모 공경 행사에 못지않은 애정과 열정을 성모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식의 방문을 더 좋아합니다. 더욱 깊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듭니다.

손솔레스 성모성지를 방문하는 동안 성지 이름의 유래에 관해 들었습니다. 스페인에서 그리스도교인과 이슬람교인 간에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에 성모상이 숨겨져 있었는데 여러 해가 지난 뒤 목동들에 의해 발견됐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이 성모상을 보았을 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정말로 아름다운 눈이야, 마치 태양 같아.” 이 외침을 스페인어로 읽으면 ‘손 솔레스’입니다. 그래서 이 성모상을 모신 성지 이름이 ‘손솔레스’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모님에 관한 복음 말씀은 그분이 당신 아드님을 한 걸음씩 착실하게 따라가셨던 예수님의 어머니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에서 한 역할을 맡으시면서 그분과 함께 기뻐하고 아파하시는 어머니인 것입니다. 복음은, 성모님에 대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이들을 사랑하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어머니의 돌봄으로 살펴주시는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카나의 결혼잔치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성모님께서는 시끌벅적한 시골 결혼식 중 하나에 초대받은 하객이었습니다. 여러 다른 마을에서 온 군중으로 붐볐습니다. 하지만 오직 성모님만이 포도주가 동이 난 것을 알아차리셨죠.

그리스도의 삶에서 만나는 이런 장면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해 보이지 않나요?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이처럼 일상적인 일들에서 드러납니다. 여인이, 특히 가정주부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아차리고, 삶을 즐겁게 만드는 작은 일들을 살피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것을 행동에 옮기셨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전한 사람이 요한이란 점도 눈여겨봅시다. 요한은 우리를 걱정하시는 어머니 성모님의 이야기를 기록한 유일한 복음사가입니다. 요한 성인은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할 때 성모님이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길 바랐습니다. 오직 요한 성인만 이 사실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님을 누구에게 부탁할지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은 성모님을 자신의 어머니로 이해하고 사랑할 줄 알았던 제자였던 것입니다.

‘주님 승천’과 ‘성령 강림’ 사이의 날들로 돌아가 봅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승리의 결과로 제자들은 믿음이 충만해진 상태입니다. 그들은 간절하게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서로가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마치 한 가족처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사도 1,14)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가장 길게 얘기해주는 복음사가는 루카 성인입니다. 루카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데 성모 마리아께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의 시작에도 성모님이 깊이 관여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 했고, 그래서 그렇게 긴 설명을 한 듯합니다.

교회가 시작된 첫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갈구하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모님을 만났고 어머니와 같은 그분의 보살핌을 경험했습니다. 성모님은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로 불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교회의 신자들이 생겨나는 데 협력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교회의 신자들은 성모님이 육신의 실제적인 어머니이신 분, 즉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께 드리는 이러한 공경의 가장 오래된 증언들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은 확신에 찬 기도라는 사실은 결코 놀랍지 않습니다.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 우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항상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여.”

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가 서로 형제처럼 느끼게 해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성모님과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를 맺는다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만 생각하거나 우리만의 문제에 골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개인의 이기적인 문제는 우리 마음속에 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예수님께 데려가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 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 8,29)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에 사로잡혀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보편 교회와 모든 영혼의 구원을 걱정해야 합니다.

스스로의 영적 쇄신에 관해 염려하는 것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사도직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체 교회의 선함을 주시하면서 우리의 내적 생활과 그리스도교의 미덕들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복음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 진심어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한 일을 결코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성이 우리 안에 스며들면 우리가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는 결국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이 될 것입니다. 비록 그 대화의 시작은 분명히 개인적 수준의 것일 수 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성모님의 손을 잡는다면, 성모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우리 형제라는 사실을 우리가 더욱 확실히 깨닫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그분의 딸이자 배우자이자 어머니이신 분이 성모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웃의 문제는 명백히 우리의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형제애는 영혼 깊이 깃들어 있는 어떤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양육하셨고 그분의 생애 내내 함께하시다가 지금은 천국에서 그분 곁에 계십니다. 바로 그 성모님께서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차리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앞길을 가로질러 가실 때, 그리고 우리 형제들이 필요로 하는 순간에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실 때, 바로 그분이 예수님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성모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도들의 스승 

그러나 우리들 자신만을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모든 인류를 끌어안을 때까지 넓혀 가십시오. 우선 여러분의 친척과 친구, 동료들처럼 여러분과 가까이 있는 분들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주님과의 더욱 깊은 친교를 깨닫게 되는지를 보십시오. 그들이 바르고 귀하며 하느님께 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특별히 우리 성모님께 그들을 인도하십시오. 그리고 또한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모든 영혼들을 위해서도 성모님께 간청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타고 항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충실하고 관대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몸,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성교회(聖敎會)를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온전한 진리를 찾는 이들은 이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사랑의 본질과 깊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펼쳐보여야 할 막중한 의무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일 수 없습니다. 만약 이기적이라면 자신이 받은 소명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선함을 무시하면서 자기 영혼만의 평화를 지키는 데 만족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입니다. 물론 그러한 평화는 당연히 거짓 평화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난 인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결코 구경꾼으로 태평하게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실천적이고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행동에 전혀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현실적인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그 장애물은 ‘그릇된 존경의 형식’을 취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일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영성적인 주제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꺼리는 겁니다. 누군가의 감정을 상하게 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을 내켜 하지 않는 것이죠. 이러한 사고는 참으로 빈번하게 이기심의 가면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처의 문제가 아니라 도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비록 개인적으로 매우 부족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숱한 단점들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1티모, 2,4) 이것이 바로 그 기쁜 소식입니다.

제가 무슨 자격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허락을 구하시지 않고 우리 삶에 들어오셨습니다. 당신의 첫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르 1,16-17)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아니요”라고 말하는 그릇된 자유까지도 갖고 있습니다. 루카 성인이 언급한 부자 젊은이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가서 가르쳐라” 라고 하신 그리스도 말씀에 따라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 그리고 이 위대한 인간적 주제에 대해 얘기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향한 열망은 인간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당신 아드님의 사랑을 만방에 알리려는 모든 이들의 여왕이시여, 당신은 우리의 고통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남루한 삶을 위해 예수님의 용서를 청해주소서. 불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재가 되어 버렸으며, 꺼져버린 등불이요 맛을 잃은 소금처럼 된 우리의 초라한 삶을 위해 용서를 구해주십시오. 하느님의 어머니시여! 당신이 청해주시면 무엇이든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위해 용서를 청해주심과 함께 신앙과 사랑의 삶을 진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어주소서.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다른 이들과 더불어 나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