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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교회 → 성령과 교회 항이 있음.

우리는 방금 사도행전에서 ‘성령 강림 대축일’에 관해 읽었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성령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오신 날입니다. 오늘 독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신 권능이 드러나는 현장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권능으로 교회의 삶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순명하심으로써 스스로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죽음과 죄를 이기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는 여기 거룩한 광채 안에서 눈부시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언했던 제자들은 성령의 기운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새로운 빛에 한껏 열렸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랐고 그분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그들이 항상 완벽하게 이해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실 ‘진리의 영’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오직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그분을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약했습니다. 그래서 시련의 순간에 주님을 홀로 두고 도망쳤던 것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벌어진 모든 일들은 이미 지나가 다시 올 수 없는 사건입니다. 굳센 영이신 성령께서 제자들을 확고하고 강하며 용감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이 예루살렘 거리에 강렬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세상 곳곳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온 남녀들이 놀라움에 가득 차 사도들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파프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사도 2, 9-11) 자신들의 눈앞에서 이토록 경이로운 일이 벌어지자 사도들의 강론을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제자들에게 강림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신앙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루카 성인에 따르면, 베드로 성인이 말씀하시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자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고 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사도 2, 37-38) 성경에 의하면 그날 3천 명가량이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일어난 성령의 장엄한 강림은 결코 별도로 동떨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성령과 그분의 활동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찾기 어렵습니다. 성령께서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든 생활과 생계 활동을 인도하고, 갈 길을 정해주고, 활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베드로 성인의 강론에 영감을 주신 분도, 사도들의 믿음을 강하게 해주신 분도, 당신의 현존을 통해 이방인에 대한 부르심을 확신하게 해준 분도,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를 먼 나라에 보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새로운 길을 열게 하신 분도 바로 성령이십니다. 한마디로 말해 성령은 항상 존재하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어디에나 계신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심오한 사실들은 결코 지나간 과거의 기억이 아닙니다. 이미 역사 속에 묻혀버린 교회의 황금기에 대한 추억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죄와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은 오늘날 교회의 실재(實在)인 동시에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교회의 현실(現實)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 14, 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영원하신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힘과 권능이 이 땅을 환하게 밝히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영원히 엄존(儼存)하십니다. 때문에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선함을 선포함으로써 언제나 모든 일에서 온 세상 민족들 앞에 우뚝 선 표징이 될 것입니다. 너무도 엄청난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확신과 기쁨에 차서 하늘을 우러러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 현존하며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맛보게 해주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려고 하시는 참 기쁨과 평화를 알게 해주십니다.

‘성령 강림 때 베드로에게 왔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가지셨으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생명을 더불어 나누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세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일러줍니다.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티토 3, 5-7)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나약함과 실패를 실감합니다. 또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몇몇 사람들의 편협함과 비열함을 아프게 깨닫습니다. 아울러 사도직의 몇몇 과업들이 명백한 실패이거나 목적을 상실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죄의 실상(實狀)과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주는 이 모든 것들이 여전히 우리들 신앙의 시련일 수 있습니다. 숱한 유혹과 의혹들이 우리로 하여금 ‘대체 어디에 하느님의 힘과 권능이 있느냐?’고 묻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우리는 더욱 선명한 순결함과 굳건함으로 희망의 덕을 구현함과 동시에, 보다 더 충실해지고자 분투함으로써 그에 대항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우리의 나약함 

“주님의 손이 짧아 구해내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사 59,1) 이전 시대에 비해 오늘날에 하느님의 권능이 결코 약해진 게 아닙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또한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 지구와 다른 천체들의 운동, 피조물들의 착한 행동, 그리고 역사상 이뤄진 모든 선한 일들… 간단히 말해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모든 일이 그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성령의 활동은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지나쳐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우리에게 드러내시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인간의 죄가 하느님의 선물이 보이지 않게 시야를 가리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느님께서 항상 역사(役事)하고 계심을 일깨워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십니다. 또한 당신의 은총으로 지음 받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성령께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단 하나의 개념으로 간추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온순함입니다. 이는 곧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활동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들 자신 안에서 성령이 주신 선물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성령이 영감을 주신 여러 활동과 제도들, 그리고 우리 마음 깊이 불러일으켜 주시는 애정과 결심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십니다. 우리가 미사 전례 때 부르는 찬미가에 나오듯이 성령께서는 은총의 수여자요, 우리 마음의 빛이며, 영혼의 손님이자, 노동 중의 휴식이며, 슬픔 속에 만나는 위로이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인간에게 순수하거나 가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때 묻은 이들을 깨끗하게 하시고, 병든 것을 치유하며, 추위를 녹이는 불을 지피고, 굽은 것을 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과 영원한 기쁨의 안전한 항구로 인간을 이끄시는 분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완벽해야만 합니다. 세상 안에 계시는 그분의 현존에 대한 믿음이 모호해져선 결코 안 됩니다.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의 권능을 쏟아부어주신 표징과 현실들을 감사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靈)께서 오실 때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16,14)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영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 안에서 거룩한 일을 수행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거룩한 일이란 이 땅에 사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그분이 정하신 성사, 그리고 그분의 교회에 대한 신앙이 없다면 성령에 대한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라 행동할 수 없으며, 진정으로 성령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마치 자신은 교회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교회를 대표하는 몇몇 사람들의 부족함과 한계를 지적하고, 교회 밖에서 교회를 심판하는 일에만 열을 올리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더 나아가서, 사제가 제대에서 미사를 집전하며 갈바리아산(골고타)의 희생을 재연할 때 성령의 특별한 중요성과 풍요로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성령 알아차리기 

성령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서 소유하셔서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더욱더 당신과 닮게 만들어주시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성숙하고 심오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멋대로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자라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 2,42)

이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방식이며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네 신앙의 가르침이 우리의 일부분이 될 때까지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체 안에서 우리 주님을 받아 모시고, 기도 안에서 주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비인간적인 행동을 감추려 들지 말고 주님과 마주 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의 방식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마도 몇 가지의 장점은 갖게 될 것입니다. 해박하게 사고하는 능력, 어느 정도 치열한 활동, 일정 수준의 실천과 헌신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영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로 일치하지 않고, 그분의 구원사업에 동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류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단순화된 버전만을 실천하는 의무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비록 각자 받은 영적 은사와 서로가 처한 인간적 상황들이 엄청나게 다양하지만, 오직 하나의 믿음, 하나의 희망, 하나의 사랑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선물을 나눠주시는 분은 한 분이신 성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던졌던 질문을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코린 3,16) 우리는 이 말씀을, 더욱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을 대하도록 우리가 초대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어떤 사람들에겐 성령은 아주 낯선 분이고 어마어마한 미지의 존재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단순히 이름뿐인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안에 계신 세 위격 중 한 분이시며, 우리가 함께 얘기할 수 있고 그분의 삶을 우리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교회 전례 안에서 우리가 배운 대로 우리는 단순하게 그리고 신뢰하며 성령을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주님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됐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엄청난 특권을 더욱 확실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제가 앞에서 언급했던 ‘거룩하게 됨’의 위대함과 진리를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게 됨’이란 하느님 당신의 생명 안에서 더불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룩한 실체들을 그려 넣는 예술가가 아닙니다. 자신에게도 생소한 듯한 그림을 그리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닮아가도록 이끄시는 성령의 방식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인 동시에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에 마치 밀납 위에 직인을 찍듯이 그분 자신의 인호를 박으십니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성령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범에 따라 우리의 본성을 회복하게 해주시고, 동시에 하느님과 닮은 모습을 인간에게 되돌려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