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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정의 → 인간 덕목인 정의 항이 있음.

복음서가 기록한 요셉 성인 

복음사가 마태오 성인과 루카 성인은 요셉 성인이 다윗과 솔로몬의 가계, 즉 이스라엘의 왕족 집안 출신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분의 선조들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명확히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두 계보(系譜) 중 어떤 것이 유다 율법에 따른 예수님의 양아버지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또한 어떤 것이 예수님의 육신을 낳아주신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울러 요셉 성인의 출신이 인구조사를 위해 다녀왔던 곳인 베들레헴인지, 아니면 그가 살았고 일했던 나자렛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그가 유복한 집안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단지 한 사람의 노동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힘들고 초라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 성인이 하신 바로 그 일을,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선택하셔서 우리 인간들과 똑같이 생계를 위해 삼십 년 동안 종사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요셉 성인이 장인(匠人)이었다고 일러줍니다. 몇몇 교부(敎父)들은 그분이 목수였다고 설명합니다. 유스티누스 성인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해 얘기하면서 요셉 성인이 쟁기와 멍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 성인이 요셉 성인의 직업을 대장장이라고 결론 지은 것은 아마도 그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어쨌든 간에 요셉 성인은 오랜 세월 고되게 땀 흘려 얻은 손재주로 이웃 시민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주던 기술자였던 것입니다.

복음서는 놀랍도록 착실한 성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그분은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여러 문제에 직면해서 어려운 상황들을 잘 대처하며,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책임감을 갖고 솔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요셉 성인을 나이든 남자로 묘사하는 전통적인 그림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런 그림들이 성모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童貞)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긴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저는 그분이 건강하고 젊은 남자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성모님보다는 조금 나이가 들었겠지만, 자신의 인생과 일에 있어서 전성기를 맞은 젊은 남자였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정결의 미덕을 실천하기 위해 굳이 늙고 기력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요. 순결이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니까요. 젊음의 힘과 유쾌함은 결코 고귀한 사랑의 장애물이 아닙니다. 요셉 성인이 성모 마리아와 결혼했을 때, 그러니까 성모님의 거룩한 모성(母性)의 신비를 알고 성모님과 함께 살게 됐던 그때 요셉 성인은 젊은 마음과 육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주고자 하신 고결함을 존중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피조물들과 삶을 나누고자 오셨다는 또 하나의 징표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에 대해 조금도 알 수 없으며,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정결의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얘기했지만, 요셉 성인은 갈릴래아 출신의 장인(匠人)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었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처럼 보잘것없는 마을 사람의 삶에 무슨 내세울 것이 있었을까요? ‘일(노동)’ 말고는 아무것도 없지요! 항상 끊임없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매일 매일의 일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가 저물면 그다음 날을 위해 휴식하며 기력을 되찾을 가난하고 작은 집이 있을 뿐이었겠지요.

하지만, 요셉이라는 이름은 히브리말로 “하느님께서 더하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삶에 전혀 예상치 못한 영역을 더해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에 의미를 주는 중요한 영역, 거룩한 영역을 부여하십니다. 이를테면 요셉의 겸허하고도 거룩한 삶에 동정 마리아와 우리 주님 예수님의 삶을 더해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한없이 너그러우십니다. 요셉 성인은 당신의 아내인 성모 마리아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새겼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 28-29).

요셉 성인은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에게 위대한 일들을 하게 하시고 그를 신뢰하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각각의 모든 사건들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성경이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찬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 1,19). 히브리말로 ‘의로운 사람’은 ‘착하고 충실한 하느님의 종’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 (참조 창세 7,1. 18,23-32) 혹은 이웃에게 훌륭하게 행동하고 자애로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참조 토빗 7,5. 9,9) 그러므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고 자기의 온 생애를 형제와 동료들을 위해 바침으로써 스스로의 사랑을 증명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요셉은 때때로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에게 아주 적은 수고비를 받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고객이 그래도 뭔가를 지불했다고 느낄 수 있는, 딱 그 정도 수준에서 수고비를 조금만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그는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게 정당한 수준의 보수를 청구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충실하다는 것이 권리를 포기한다는 의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권리는 사실상의 의무이기도 하니까요. 요셉 성인은 정당한 보수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그에게 의탁하신 가족을 부양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이유로 요구해선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도 똑같이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의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다른 사람들의 결핍을 잊어버리고 종교가 주는 안락함 속에 스스로를 걸어 잠근다면 그건 정말로 잘못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정의로운 이들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위해서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고귀한 열망을 이루기 위해 일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성인의 유명한 말씀을 통해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정당하게 행동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의 마음속엔 진실이 없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수호 성인이신 성 요셉을 기념하는 축일을 선포한다는 교회의 결정을 듣고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듯이 저도 기뻤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이 축일은 노동의 거룩한 가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복음의 중요한 진리에 대해 어떻게 공식적으로 화답하는지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묵상하길 바라시는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개인적·사회적 불의(不義)에 당연히 맞서 싸우도록 그리스도인을 북돋웁니다. 그런 불의에 대항할 때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조급함과 걱정, 그리고 불편함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 세기 동안 인류는 서로 어울려 살아왔지만, 여전히 엄청난 증오와 파괴, 광신주의를 자신들의 눈 속에, 그리고 마음 깊이 쌓아두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고, 좋아하고 싶어하지도 않으면서 말이죠.

이 땅의 재화(財貨)는 소수의 인간들에게 독점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문화 역시 인간이 만든 파벌들에 의해 제한받습니다. 하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으며, 교육을 받지도 못합니다. 모든 인간의 삶은 거룩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의 삶이 그저 통계를 장식하는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이를 고치고자 하는 조급함을 저는 이해하고 동감합니다. 그런 조급함이 저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분은 당신이 주신 새로운 사랑의 계명을 우리가 실천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의 삶이 처한 모든 상황들은 하느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 메시지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응대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요구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 31-40)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형제의 모습으로, 우리 주위 사람들의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려 하실 때 그분을 알아봐야 합니다. 어떤 인간의 삶도 결코 홀로 고립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삶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어느 남자도 어느 여자도 결코 단 한 줄의 따로 떨어진 시구(詩句)가 아닙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 모두는 하느님과 함께 한 편의 거룩한 시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도적 과업은 사회적 문제들에 있어서 특별한 결과를 빚어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세상에 등을 돌려야 한다거나 인간의 본성이란 관점에서 봤을 때는 비관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면, 이는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입니다.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은 ‘인간적인 의미’와 ‘거룩한 의미’를 동시에 가집니다. 완벽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적인 것들을 파괴하려고 오신 게 아니라, 오히려 일으켜 세우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죄(罪)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스스로 취하셨습니다. 그분은 고의적인 악심(惡心)을 제외한 인간의 모든 관심사를 더불어 나누려고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를 그 내부로부터 거룩하게 할 준비가 항상 돼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온전히 이 세상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하느님을 부인한다면, 또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사랑 넘치는 뜻에 반대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은 세상이 가진 천성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평화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를 여러분께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열정을 다해서 분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를 얘기하자면, 우리 인간이 진정 정의로워지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이 맺는 관계들이 증오와 무관심이 아닌 사랑에 의해 영감을 받으려면 너무 먼 길을 가야 하는 까닭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설사 우리가 부의 합리적 분배와 조화로운 사회조직을 이루어낸다 하더라도 여전히 세상에는 병마와 오해, 고독, 사랑하는 이의 죽음,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한계를 절감(切感)해야 하는 고통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고통의 무게와 마주 서서 그리스도인이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정한 해답, 유일하고 결정적인 답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셔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하느님입니다. 창에 찔린 채 당신의 성심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불의를 미워하시며 불의를 저지른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의가 발생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왜냐하면 불의는 원죄의 결과로서 인간 조건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성심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간절히 정의를 바라는 배고픔과 갈증… 그분은 이 모든 아픔들을 십자가를 통해 당신 홀로 온전히 짊어지셨습니다.

고통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선 모든 인간의 삶에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아픔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여러분께 숨기지 않겠습니다. 제 인생에도 자주 아픔이 있었고, 몇 번이고 정말로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얘기를 여러분께 기쁘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만나야 한다는 진리를 항상 강론해왔고, 또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불의와 악(惡)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열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과도 맞서 싸워왔습니다.

고통에 관해 얘기할 때 단순히 이론만 말씀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고통과 맞닥뜨려서 여러분의 영혼이 흔들린다고 느낀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최선의 치유책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릴 때 저는 다른 사람의 경험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갈바리아산의 수난 장면은, 고통은 거룩하게 변모해야 하며 우리는 십자가와 하나 되어 살아야 한다는 진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려움을 참고 견딘다면, 그 어려움은 속죄(贖罪)와 배상(賠償)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 어려움은 또한 예수님의 운명과 그분의 생명을 우리가 함께 나누도록 해줍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고뇌를 스스로 기꺼이 겪어내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하게 태어나고, 생활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공격받고, 모욕당하고, 헐뜯기고, 중상모략에 걸리고, 부당하게 비난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당신을 배신하고 버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고독을 실감했고 형벌과 죽음의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동료들과 함께,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고 계십니다. 인류의 머리이자 맏이이시며 구원자이신 그분께서 같이 아파하고 계신 것입니다.

고통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긴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수난을 견디기 힘드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 22,42)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간청하며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들을 용서하시면서 묵묵히 죽음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처럼 고통을 초자연적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은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가져야 할 자세는 닥쳐올 비극적 운명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승리를 예감한 사람의 성취감입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통해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악과 불의와 죄에 맞서 평화의 투쟁을 벌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현재 처해 있는 형편이 결코 확정된 상태가 아님을 공표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만이 인간의 영광스러운 영적 승리를 얻게 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