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3«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세계 → 세상에 대한 사랑 항이 있음.

우리의 일상 돌아보기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맺으신 관계를 묵상하고, 우리 자신이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 그분께 우리의 동료들을 데려가기 위해 복음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배움을 매일 매일의 일상과 우리들 각자의 삶에 적용해봅시다. 동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일상적 삶이란 결코 무료하거나 재미없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 자녀들의 대다수가 성덕을 이루길 바라시는 현장이 바로 일상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특권을 가진 부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명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분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드러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각자가 처한 형편이 어떻든 간에, 개개인의 사회적 위치와 직업이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일상의 삶이란 엄청난 가치를 지닌 어떤 것입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만나는 바로 그 현장에서, 우리가 당신과 일치를 이루어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행복을 통해, 우리 동료들의 인간적인 관심을 통해, 그리고 우리 가족의 삶을 이루는 일들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또한 역사의 각 시기마다 드러나는 거대한 문제와 갈등 그리고 도전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 역사적 갈등과 도전이야말로 대다수 인간의 노력과 이상(理想)을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개인적·사회적 불의(不義)에 당연히 맞서 싸우도록 그리스도인을 북돋웁니다. 그런 불의에 대항할 때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조급함과 걱정, 그리고 불편함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 세기 동안 인류는 서로 어울려 살아왔지만, 여전히 엄청난 증오와 파괴, 광신주의를 자신들의 눈 속에, 그리고 마음 깊이 쌓아두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고, 좋아하고 싶어하지도 않으면서 말이죠.

이 땅의 재화(財貨)는 소수의 인간들에게 독점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문화 역시 인간이 만든 파벌들에 의해 제한받습니다. 하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으며, 교육을 받지도 못합니다. 모든 인간의 삶은 거룩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간의 삶이 그저 통계를 장식하는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이를 고치고자 하는 조급함을 저는 이해하고 동감합니다. 그런 조급함이 저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분은 당신이 주신 새로운 사랑의 계명을 우리가 실천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의 삶이 처한 모든 상황들은 하느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 메시지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응대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요구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 31-40)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형제의 모습으로, 우리 주위 사람들의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려 하실 때 그분을 알아봐야 합니다. 어떤 인간의 삶도 결코 홀로 고립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삶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어느 남자도 어느 여자도 결코 단 한 줄의 따로 떨어진 시구(詩句)가 아닙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 모두는 하느님과 함께 한 편의 거룩한 시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돌보심 안에 있습니다. 단순히 기능적 범주에만 우리들 자신을 국한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돌보심에 관해 신학적으로 살펴봅시다. 그렇게 살펴보면, 세상에는 오직 세속적인 것들만 존재한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함이나 고귀함, 또는 공평함 같은 것들이 그 예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인간의 자녀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그분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고, 당신 손으로 직접 일하셨으며, 친교와 순명과 고통과 죽음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러니 세상 모든 것들을 세속적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콜로 1,19-20)

우리는 세상과 그 안에서 하는 일들과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좋은 것이니까요. 아담의 죄가 하느님께서 주신 창조의 균형을 깨버렸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평화를 다시 세우기 위해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로 인해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된 우리들은 당신의 창조 질서를 무질서 상태에서 해방시키고, 모든 것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개의 인간이 처한 상황은 모두 특별합니다. 그들이 저마다 특별한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자신이 받은 소명을 열정적으로 살아냄으로써 ‘그리스도의 영성’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으며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들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일치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 일을 해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