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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죄 → 회개 항이 있음.

하느님의 자녀들 

여러분은 이 확신에 찬 기도를, 악(惡)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 깨달음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이런 확신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 ‘하느님의 자녀됨’이야말로 언제나 제게 경이롭게 다가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사순시기에 우리의 변화를 요청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결코 포악한 지배자도, 엄격하고 무자비한 심판자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관대함과 우리의 죄와 실수에 관해 말해주십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은 우리를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시기 위해서이며, 당신과 나누는 친교와 사랑을 약속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기쁘게 회개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는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가 되돌아오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됨’은 오푸스데이 영성의 바탕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버지를 여러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깨닫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세상 한가운데 있는 당신 집으로 우리를 데려가서 하느님의 가족이 되게 하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것이 곧 우리의 것이고 우리의 것이 바로 그분의 것입니다. 마치 달을 따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간구하는 친근함과 자신감을 키워가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주님을 아버지로 모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아첨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단순히 격식과 예의만을 차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참으로 진실되고 의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진노하시게 만들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불신(不信)을 참으실 수 있습니다. 당신 자녀들이 주님께 돌아올 때, 회개하며 용서를 청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어떤 잘못도 용서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너무도 좋은 아버지여서 용서받고 싶어 하는 우리의 소망을 항상 기다리시며, 은총 가득한 당신의 팔을 벌리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지어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예화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예화를 기억해봅시다. 바로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20) 성경에 기록돼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보다 더 인간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부성애를 이보다 더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달려오실 때 우리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성인과 함께 ‘아빠, 아버지(Abba, Pater)’라고 외칩니다. 비록 하느님께서는 우주의 창조주이시지만,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찬양하며 반기지 않더라도 괘씸하게 여기지 않으시며, 당신의 위대하심을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단지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길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기쁨에 가득 차서 이 ‘아버지’라는 말을 음미하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삶이란 끊임없이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통회(痛悔)를 통해서, 마음의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마음의 회개는 스스로 변화하고픈 열망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굳센 결심, 희생과 자기증여(自己贈與)라는 말로 표현되는 그 확고한 다짐을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갑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입고, 그분의 형제이자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용서의 성사(고해성사)’를 통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화 속 아버지처럼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비록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없을지라도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빚이 얼마나 많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방탕한 아들과 똑같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열고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는 것뿐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응답은 너무나 초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실제로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 거룩한 선물에 놀라고 기뻐하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거룩한 미사에 “온전히 참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기도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미사야말로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란 사실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확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리 죄를 씻고, 우리가 정화되며,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경험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하나 됨을 체험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느님 사랑의 위대하심에 응답할 수 있을지, 아마도 한두 번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을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명료하게 설명한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보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답은 간단합니다. 모든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애정을 다해 미사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깊게 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요약한 희생제사, 미사성제 안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미사 때 계속 이어지는 기도에서, 그리고 여러분 눈앞에 펼쳐지는 행동에서, 그 수많은 경우에 여러분이 보아온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립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다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 삶의 여러 모습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 모습들 가운데는 우리가 개선해야 하는 것들이 있고, 우리가 이겨내야 하는 악덕(惡德)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를 생각하며 우리가 발전시켜야 할 형제적 태도도 있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제대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우리의 청춘에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의 제대입니다. 미사는 기쁨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그리스도와 모든 성인들의 상징인 제대에 입을 맞출 때에 사랑, 감사, 그리고 기쁨이 드러납니다. 제대는 작은 평상(平床)이지만 거룩하게 마련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무한한 가치를 지닌 성사가 우리 앞에서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참회’는 우리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죄를 추상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죄와 연약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Kyrie, eleison, Christe, eleison)” 라고 반복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공로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면, 쓰라린 슬픔을 맛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자비로 인해 우리는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대영광송(Gloria)’이 바로 그것입니다.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시나이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평화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를 여러분께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열정을 다해서 분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를 얘기하자면, 우리 인간이 진정 정의로워지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이 맺는 관계들이 증오와 무관심이 아닌 사랑에 의해 영감을 받으려면 너무 먼 길을 가야 하는 까닭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설사 우리가 부의 합리적 분배와 조화로운 사회조직을 이루어낸다 하더라도 여전히 세상에는 병마와 오해, 고독, 사랑하는 이의 죽음,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한계를 절감(切感)해야 하는 고통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고통의 무게와 마주 서서 그리스도인이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정한 해답, 유일하고 결정적인 답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셔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하느님입니다. 창에 찔린 채 당신의 성심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불의를 미워하시며 불의를 저지른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의가 발생하도록 그냥 두셨습니다. 왜냐하면 불의는 원죄의 결과로서 인간 조건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성심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간절히 정의를 바라는 배고픔과 갈증… 그분은 이 모든 아픔들을 십자가를 통해 당신 홀로 온전히 짊어지셨습니다.

고통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선 모든 인간의 삶에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아픔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여러분께 숨기지 않겠습니다. 제 인생에도 자주 아픔이 있었고, 몇 번이고 정말로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얘기를 여러분께 기쁘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만나야 한다는 진리를 항상 강론해왔고, 또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불의와 악(惡)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열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과도 맞서 싸워왔습니다.

고통에 관해 얘기할 때 단순히 이론만 말씀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고통과 맞닥뜨려서 여러분의 영혼이 흔들린다고 느낀다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최선의 치유책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릴 때 저는 다른 사람의 경험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갈바리아산의 수난 장면은, 고통은 거룩하게 변모해야 하며 우리는 십자가와 하나 되어 살아야 한다는 진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려움을 참고 견딘다면, 그 어려움은 속죄(贖罪)와 배상(賠償)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 어려움은 또한 예수님의 운명과 그분의 생명을 우리가 함께 나누도록 해줍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고뇌를 스스로 기꺼이 겪어내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하게 태어나고, 생활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공격받고, 모욕당하고, 헐뜯기고, 중상모략에 걸리고, 부당하게 비난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당신을 배신하고 버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고독을 실감했고 형벌과 죽음의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동료들과 함께,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고 계십니다. 인류의 머리이자 맏이이시며 구원자이신 그분께서 같이 아파하고 계신 것입니다.

고통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긴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수난을 견디기 힘드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 22,42)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간청하며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들을 용서하시면서 묵묵히 죽음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처럼 고통을 초자연적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은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가져야 할 자세는 닥쳐올 비극적 운명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승리를 예감한 사람의 성취감입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통해 평화와 기쁨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악과 불의와 죄에 맞서 평화의 투쟁을 벌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현재 처해 있는 형편이 결코 확정된 상태가 아님을 공표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만이 인간의 영광스러운 영적 승리를 얻게 해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은 보물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거슬렀을 때만 우리는 그 기쁨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는 이기심의 열매이고, 이기심은 슬픔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우리 영혼의 파편 아래로 약간의 기쁨이 살아남습니다. 하느님도, 성모님도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회개해서 그 슬퍼하는 몸짓이 우리 마음으로부터 우러난다면,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만나 용서하시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슬픔도 우리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 32) 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에겐 오직 기뻐할 권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돌아온 탕자’ 예화의 놀라운 결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아무리 많이 묵상해도 질리지 않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나오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맞으시기 위해 허리를 굽히시고, 사랑과 다정함의 표시로 입을 맞추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새 옷과 반지와 발에 맞는 신발을 가져다주라고 하인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야단맞을까 봐 겁내지만, 그분은 여러분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지만, 그분은 여러분에게 입을 맞추십니다. 여러분은 험한 말로 질책받을까 무서워하지만, 아버지는 여러분을 위해 잔치를 준비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도 관대하신 분이라면, 그런 분이 항상 당신께 충실했던 원죄 없으신 어머니, 동정 성모님께 어떻게 영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자주 하느님을 배신합니다. 그런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이 너무 작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은 어마어마한 결과를 이뤄주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았던 성모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뤄지겠습니까?

보십시오.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례는,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례는 이것을 설명하기보다는 찬미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성모님을 칭송하는 우리들 각자의 열정이 더욱 커질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것을 다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부족할 것입니다.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묵시 12,1) “임금님이 너의 아름다움을 열망하시리니 그분께서 너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앞에 엎드려라. 한껏 화려하게 꾸민 임금님 딸이 금실로 수놓은 옷에 싸여 안으로 드는구나.” (시편 45, 12,14)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례는 성모 마리아의 말씀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 말씀 안에서 최고의 겸손이 최고의 영광과 한데 이어집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루카 1,48-49)

가장 감미로우신 성모 성심이시여, 안전한 길을 예비해 주소서. (Cor Mariae Dulcissimum, iter para tutum). 이 땅에서 저희가 항상 마음 놓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하소서. 저희를 위해 당신께서 저희가 따라갈 길이 되어주소서. 당신의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을 당신께서는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 전례력 상의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제대(祭臺)의 거룩한 희생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드리는 희생 제물을 새롭게 봉헌합니다. 우리가 곧 감사송에서 함께 노래하겠지만, 정의와 사랑,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성스로운 인간애를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의 영혼 깊이 엄청난 기쁨을 실감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처럼 인간의 마음을 가지신 왕입니다. 그분은 온 우주와 모든 피조물을 지으신 분이지만, 결코 전제 군주처럼 우리 위에 군림하시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당신의 상처를 우리에게 말없이 내보이며 작은 사랑을 당신께 달라고 하실 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알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여전히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루카 19,14)라는 잔인한 거부의 목소리를 듣는 걸까요? 이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거부하는지조차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분 얼굴의 아름다움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얼마나 놀라운지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슬프고 안타까운 상황 때문에 저는 주님께 속죄하고 싶습니다. 말보다 비열한 행동으로 표현되는 끊임없는 아우성들을 들을 때면 저는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행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온갖 방법으로 그분을 반대합니다.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인간 사회에 대한 접근 방식을 통해, 도덕과 과학과 예술을 통해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말로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악당들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의 행동으로 그분을 모독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왕’이란 표현만으로도 기분이 상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 왕직’이 정치적 용어로 생각될 수도 있다는 듯이 그 말에 대해서 고지식하게 반대합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왕이라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길 거부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계율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계율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경이로운 사랑(愛德)의 계명조차도 말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길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야망은 스스로의 이기심을 섬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주님께서는 제게 “저는 섬길 것입니다”라고 말없이 반복해서 외치도록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이 굳세지도록 해달라고 주님께 부탁드립시다. 매일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소란 떨지 말고 천진한 마음으로 당신의 부르심에 항상 충실하게 해달라고 간청합시다. 그리고 우리 마음 깊이 그분께 감사드립시다. 우리는 당신 사랑의 대상이자 당신의 자녀로서 그분께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의 입은 젖과 꿀로 넘쳐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관해 얘기하며 참으로 큰 기쁨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쟁취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