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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는 를 주제로 하는 3 항이 있음.

그리스도인들이 전통적으로 성주간이라고 부르는 이번 주간에 우리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집니다. 바로 예수님 삶의 마지막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다시 체험하는 기회입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신심을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들입니다. 그런 표현들이 우리 마음에 불러오는 것들은 예외 없이 당연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향합니다. 그분의 부활이야말로 바오로 성인의 말씀대로 우리들 신앙의 밑바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여정을 너무 서둘러 걸어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매우 간단한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안에서 그분과 일치를 이루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부활을 더불어 나눌 수 없을 것입니다. 성주간의 말미에 주님의 영광 안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려면, 우리는 우선 번제물(燔祭物)이 되신 그분의 안으로 들어가 진실로 주님과 하나가 돼야 합니다. 그분이 갈바리아산에서 돌아가셨을 때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결한 자기희생은 죄에 대한 도전입니다. 죄의 존재를 결코 부정할 수 없지만, 죄의 실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죄는 그야말로 죄악(罪惡)의 신비(mysterium iniquitatis)를 보여줍니다. 이는 피조물이 범하는 설명할 수 없는 죄악입니다. 피조물 자신의 교만함이 스스로를 하느님께 대항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인류만큼이나 오래됐습니다. 인류의 원조(元祖), 즉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함께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인류의 활동 여기저기서 끝없는 타락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들 각자가 개별적으로 하느님을 거스르기에 이르렀습니다. 죄라는 것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깨닫기란 정말로 어렵습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이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건 참으로 힘듭니다. 인간적인 맥락에서도 죄의 경중(輕重)은 피해자의 중요도에 따라, 그러니까 그 죄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자격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인간이 죄를 지어서 하느님께 상처를 드렸다면 어떻겠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를 부인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이십니다. 인간의 죄악이 짊어진 악의 심연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극복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잘못을 보속하고, 무너져버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일치를 다시 세우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런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구약의 번제물로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하느님이신 인간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상상해본다면 이 불가해한 신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세 위격께서는 서로 방해하지 않으시면서 무한한 사랑의 친교 안에 함께하십니다. 삼위일체께서 내린 불변의 결정에 따라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께서 인간성을 취하시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우리가 겪어야 할 참혹한 슬픔의 짐을 견디셨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이후 그리스도의 모든 삶은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실현하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분과 함께 3년 동안 살았던 사도들은 계속해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라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신의 희생제사가 완결되신 첫 성금요일 오후까지도 그 가르침은 계속되었습니다.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요한 19,30)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잘못을 홀로 지시고 그 무게에 짓눌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순전히 우리의 죄가 저지른 폭력과 사악함 때문에 쓰러지신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상처 입으신 주님을 묵상합시다. 어떤 문구도 당시의 실제상황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진실에 가까운 표현을 사용하자면 오래전 어느 작가가 쓴 글귀를 인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은 고통의 자화상이다.” 생명을 잃은 그분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져 어머니 성모님께 전달됐습니다. 그때 멍들고 으스러진 그리스도를 보고, 그렇게 파괴된 예수님을 보고, 우리는 아마도 그분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한때 그를 따르던 군중은 어디에 있으며, 그가 예언했던 왕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바로 승리였습니다. 결코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부활에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당신의 순명으로 이루신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갈바리아산의 그 드라마를 다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설명하건대, 예수님께서 죽으신 갈바리아산의 그 드라마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거행된 최초의 미사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죽음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은 당신에게 사형선고로 내려진 십자가를 껴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희생은 당신 아버지에 의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희생의 결과로 성령께서 인류에게 강림하신 것입니다.

수난의 비극은 우리의 삶과 전체 인류의 역사에 성취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성주간이 단순한 기념시기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우리 영혼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는 그 무엇인가로 여기고 묵상하는 시기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제2의 그리스도이자, 그리스도 자신(alter Christus, ipse Christus)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우리 삶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1베드 2,5) 사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순명을 드러낼 수 있으며, 따라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명을 우리가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우리 자신의 비참함과 개인적인 타락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 때문에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비관주의자가 되어선 안 되며, 우리의 이상을 버려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당신의 삶을 더불어 나눔으로써 우리 삶이 거룩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거룩함’이란 헛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거룩함이란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이고, 왠지 수덕신학(修德神學)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거룩함은 실질적인 목표도, 살아있는 실재(實在)도 아닙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를 설명할 때 “성도(聖徒)”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로마 16,15)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는 모든 성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필리 4,21)

지금 갈바리아산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지만 그분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나타내는 표식은 아직 없습니다. 성금요일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기를 원하는지, 진정 거룩하게 되길 원하는지 성찰하기에 좋은 시기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에 맞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으며 우리가 매일 하는 일에 사랑을 쏟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죄의 체험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성장해야 합니다. 또한 더욱 충실해지고 진정으로 우리 주님과 하나가 되겠다고 더 깊이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의 사도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주신 사제로서의 사명을 꾸준히 수행해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사제의 사명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도록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현실적인 삶은 숱한 한계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 안에 죄는 여전히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온전히 자유롭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하느님 자녀가 된 풍요로움을 명확히 감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기쁨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될 때에도 역시 하느님의 자녀된 풍요를 느낍니다. 아무도 우리의 희망을 빼앗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감탄하며 바라볼 수 있으며, 창조의 풍성함과 선함의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마음이 지음 받은 그대로의 강인함과 순수함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죄로 인한 슬픔이 고통스러운 절망이나 오만함으로 악화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슬픔과 자각은 우리 스스로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동참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연대를 더욱 깊이 실감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삶에서 성령의 확실한 힘을 체험합니다. 우리들 자신의 실패가 더 이상 우리를 낙담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초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삶의 모든 순간에 언제나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충실한 증거자가 되도록 우리를 이끄는 초대인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개별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런 단계에 이르면 우리의 개인적인 나약함은 더 이상 우리 영혼을 동요시키지 않는 작은 결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약점들이 심각한 죄가 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진정한 회개의 슬픔으로 고해성사를 드린다면 우리는 하느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고 다시금 당신 자비의 선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도록 한다면 우리의 믿음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풍요로움을 하나로 집약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다음과 같은 얘기로 오늘 강론을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 전례에서 부르는 찬미가 중 한 대목을 소리 높여 부릅시다. 마치 온 교회가 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간구하는 기도의 메아리처럼 말입니다. “임하소서, 성령이여! 창조주여 임하소서. 당신께 속한 이들 마음에 오셔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창조한 마음들을 채우소서… 당신을 통해 성부를 알고 성자도 알게 되었으니, 당신을 믿게 하소서. 성령께서는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오시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