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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인간적인 덕 → 기쁨 항이 있음.

성탄이 가까워올 때마다 저는 아기 예수님의 상징물들을 즐겨 봅니다. 스스로 낮아지신 하느님을 나타내는 조각상과 그림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줍니다. 전지전능하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알기 원하십니다. 당신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희생의 삶, 일을 하고 기쁨을 누리는 삶을 온전히 살아내도록 재촉하십니다.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처럼 우리도 겸손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구유 안입니다. 포대기 안입니다. 마구간 안입니다. 우리들이 구원사업의 협력자가 되도록 하는 힘은 오직 겸손을 통해서만 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은 그만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실감해야 합니다.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일지라도 개인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때때로 생기는데, 실제로 심각한 걱정을 낳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라는 것들은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스스로 오만해지고, 모든 이들의 중심에서 관심받고 싶어하며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솟아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항상 좋은 모습으로 보이길 원하고, 개인적으로 번듯하게 잘 되기를 바랍니다. 남몰래 실천하는 선행에 만족하지 못하다 보니, 영혼의 놀라운 평화와 엄청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만과 억측에 빠져 불행해지고 허망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겸손하셨습니다. 당신의 삶을 통틀어 그분은 어떤 배려나 특권을 좇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이신 그분은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성모님의 태중에서 9개월을 보내시는 것으로 지상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자연스러운 탄생과정을 따르신 것입니다. 그분은 인류가 당신을 간절하게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고, 모든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오시기를 갈망하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기다리셨습니다. 다른 모든 아기들이 태어나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잉태에서 탄생에 이르기까지 성모님과 요셉 성인 그리고 엘리사벳 성인을 제외하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이 경이로운 진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사시기 위해 오셨다는 놀라운 진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참으로 소박하셨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위풍당당하게 세상에 오시지 않았고 아무도 그분에 대해 몰랐습니다. 지상에서는 오직 성모 마리아와 요셉만이 이 거룩한 사건에 함께했을 뿐입니다. 나중에 천사의 메시지를 들은 목동들이 왔고, 동방박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을, 하느님과 인간을 하나로 이어준 이 초자연적 사건의 유일한 증인들이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에 무감해질 만큼 우리의 가슴이 무딜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베푼 사랑에 우리가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권능뿐만 아니라 그분의 놀라운 겸손 앞에서 우리의 자유가 머리 숙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이신 이 아기의 위대함이란…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분의 아버지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느님이신데, 정작 하느님의 아들은 “여관에 들어갈 자리에 없어서…” (루카 2,7) 구유에 누워계십니다. 모든 피조물의 주님께서 계실 곳이 어디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황금, 유향, 그리고 몰약 

복음서는 동방박사들의 심정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마태 2,10) 왜 동방박사들은 그토록 기뻐했을까요? 왜냐하면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확증을 받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별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확증 말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별을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별이 그들의 영혼 속에서 항상 빛나도록 간직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소입니다.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별은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그야말로 “세상 끝날까지” (마태 28,20) 우리와 함께 계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면, 사라졌던 별은 또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소가 진짜라는 이 생생한 증거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더욱 크게 만드는 위대한 기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마태 2,11)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인성(人性) 안에 숨으신 하느님, 예수님 앞에 무릎 꿇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다시 한번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의 거룩한 부르심에 등 돌리기를 원치 않겠습니다. 결코 주님과 떨어지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충실히 따르는 길에 장애물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치워버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모든 영감에 진심으로 따르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온 마음으로, 그리고 저는 제 온 마음을 다해, 깊은 침묵의 외침으로 충심을 담아 기도하며 아기 예수님께 얘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예화에 나오는 착한 종처럼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마태 25,23) 라는 주님의 응답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의무를 다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고 말입니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마태 2,11) 성경의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 잠시 생각해봅시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우리가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자, 성경을 읽어봅시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야고 1,17). 주님의 선물이 지닌 심오함과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싶어도 인간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 (요한 4,10) 하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라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정의를 추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나머지 것들은 저절로 따라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구원경륜(救援經綸)’ 안에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사랑 가득히 보살펴 주십니다. “이 사람은 이런 은사, 저 사람은 저런 은사, 저마다 하느님에게서 고유한 은사를 받습니다.” (1코린 7,7). 그러므로 하느님께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봉헌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한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염려일 것입니다. “빚을 갚을 수 있는 길이 없는 채무자처럼 (마태 18, 25)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예물은, 더 이상 하느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구약 성경의 제물과도 같을 것입니다.“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히브 10,8)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직접 당신이 원하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분은 재물에도, 땅의 열매나 짐승들에게도, 바다나 대기(大氣)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당신께 속한 것이니까요. 그분께서는 무언가 친밀한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신께 기꺼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아, 너의 마음을 나에게 다오.” (잠언 23,26) 아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나눠 갖는 것에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을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들 자신을 하느님께 드릴 때에 다른 예물도 우리 주님께 봉헌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황금을 드립시다. 우리가 영적으로 돈과 물질적 재화로부터 벗어나 있을 때, 우리가 얻은 그 귀한 금을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왜냐하면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것들을 사용하되 우리 마음이 그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며, 모든 인류의 선익(善益)을 위해 그것들을 잘 사용해야 한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세속의 재물이라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이 그것들을 우상으로 삼아 떠받들고 숭배할 때 재물은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선한 일을 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 재물은 고귀해집니다. 의롭고 자애로운 그리스도교적인 일에 쓰일 때 재물은 고결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재물을 마치 보물인 양 추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보물은 여기, 이 구유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보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사랑과 소망의 중심에 그분이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6,21)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은 보물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거슬렀을 때만 우리는 그 기쁨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는 이기심의 열매이고, 이기심은 슬픔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우리 영혼의 파편 아래로 약간의 기쁨이 살아남습니다. 하느님도, 성모님도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회개해서 그 슬퍼하는 몸짓이 우리 마음으로부터 우러난다면,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만나 용서하시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슬픔도 우리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에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루카 15, 32) 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에겐 오직 기뻐할 권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돌아온 탕자’ 예화의 놀라운 결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아무리 많이 묵상해도 질리지 않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나오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맞으시기 위해 허리를 굽히시고, 사랑과 다정함의 표시로 입을 맞추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새 옷과 반지와 발에 맞는 신발을 가져다주라고 하인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야단맞을까 봐 겁내지만, 그분은 여러분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지만, 그분은 여러분에게 입을 맞추십니다. 여러분은 험한 말로 질책받을까 무서워하지만, 아버지는 여러분을 위해 잔치를 준비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도 관대하신 분이라면, 그런 분이 항상 당신께 충실했던 원죄 없으신 어머니, 동정 성모님께 어떻게 영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자주 하느님을 배신합니다. 그런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이 너무 작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은 어마어마한 결과를 이뤄주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을 조금도 거스르지 않았던 성모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뤄지겠습니까?

보십시오.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례는,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례는 이것을 설명하기보다는 찬미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성모님을 칭송하는 우리들 각자의 열정이 더욱 커질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것을 다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부족할 것입니다.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묵시 12,1) “임금님이 너의 아름다움을 열망하시리니 그분께서 너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앞에 엎드려라. 한껏 화려하게 꾸민 임금님 딸이 금실로 수놓은 옷에 싸여 안으로 드는구나.” (시편 45, 12,14)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례는 성모 마리아의 말씀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 말씀 안에서 최고의 겸손이 최고의 영광과 한데 이어집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루카 1,48-49)

가장 감미로우신 성모 성심이시여, 안전한 길을 예비해 주소서. (Cor Mariae Dulcissimum, iter para tutum). 이 땅에서 저희가 항상 마음 놓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하소서. 저희를 위해 당신께서 저희가 따라갈 길이 되어주소서. 당신의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을 당신께서는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