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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인간적인 덕 → 용기 항이 있음.

예수님의 삶에서 일어난 다른 여러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숨겨진 시간들을 묵상할 때도 우리는 언제나 감동하게 됩니다. 이 30년의 시간은 우리의 이기심과 나태함을 털어내라는 부르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한계와,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마음과, 우리의 욕망을 알고 계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를 내어주는 것이 인간에겐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사실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또한 사랑을 찾을 수 없을 때의 심정이 어떤지, 입으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반쯤 무관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 기분이 어떤지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복음사가들이 묘사한 인상적인 장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세속적인 욕망에 가득 차고 오직 인간적인 계획에만 몰두하는 사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도들을 가까이에 두시고 당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을 그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우리를 부르시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물으 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마태 20,22) 여기서 ‘잔’이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여러분 자신을 바칠 수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때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습니다.(Possumus!). 우리는 준비돼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그럴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모든 일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온 마음을 주님께 드렸던가요? 아니면 하느님이 아닌 우리들 자신에 얽매이고, 우리의 이익과 편안함, 그리고 자기애에만 집착하고 있나요? 우리 생활 속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요? 우리의 길을 그리스도인답게 바꾸는 것을 꺼리게 만드는 무엇이 있는 겁니까? 다행히 이 모든 것을 올곧게 바로잡을 기회가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이 질문들을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주셨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질문을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인 것입니다. 저는 감히 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큰 소리로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각자 마음속으로 조용히 우리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주님, 제가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인지요, 얼마나 겁쟁이인지요! 얼마나 많은 실수를 거듭해왔는지요.” 그러고 나서야 조금 더 나아가 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뭐 괜찮습니다. 주님, 당신의 손길로 저를 지켜주고 계시니까요. 만약 저를 그냥 내버려두신다면 저는 정말로 최악의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를 내버려두지 마세요. 어린아이처럼 저를 보살펴 주십시오. 저는 강하고 용감해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저를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입니다. 주님, 제 손을 잡아 이끌어 주십시오. 당신의 성모님께서 항상 제 곁에서 지켜주시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possumus!)! 당신을 우리의 본보기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주제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거룩한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그 거룩한 길을 인간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길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그렇게 낮추신 이유입니다. “그분이 당신 자신을 그리도 낮추셔서 종의 모습을 취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 주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존재셨지만, 자신의 위엄과 권능을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그러나 선함과 자비는 그대로이셨습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거룩한 길을 우리가 쉽게 갈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초대를 거부하지 맙시다. 그분께 “아니요.”라고 말하지 맙시다. 그분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지 맙시다. 핑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할 거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범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온 마음을 다해 여러 형제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귀중한 본보기를 무시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을 따르고 성령 안에서 여러분의 영혼을 새롭게 하십시오.”

성사의 경이로움에 관해 계속 묵상합시다. 종부성사라고 불리는 병자성사를 통해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서 마무리되는 여정을 위한 사랑 가득한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과 더불어 당신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체성사를 가리켜 ‘거룩함이 과대(過大)한 성사’라고까지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미사 동안만이 아니라, 실제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당신의 성체와 영으로, 당신의 성혈과 신성(神性)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사제가 지닌 책임에 관해 자주 생각합니다. 그 책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성사의 거룩한 통로를 보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영혼을 돕기 위해 오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특별한 개인적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을 일괄적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개별적으로 돕지 않으면 인간의 존엄과 하느님의 자녀의 존엄을 해치게 됩니다. 이는 옳지 않은 일입니다. 사제는 각각의 영혼을 개별적으로 돕는 바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이자 운송 수단에 불과합니다. 사제가 이런 사실을 잘 알면 겸손해지고, 그런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혼은 하나하나가 경이로운 보물이며, 모든 사람은 저마다 아주 특별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우리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그리스도께서 성혈을 흘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투쟁의 필요성에 관해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투쟁을 하려면, 훈련과 적당한 몸관리, 그리고 아프거나 멍들거나 상처가 났을 때에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성사는 교회가 제공해야 하는 중요한 치료입니다. 성사는 사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진해서 성사를 포기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 쉴 공기와 혈액의 순환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는 성사를 필요로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매 순간 알아차릴 수 있는 빛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성사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금욕주의는 힘을 요구합니다. 그 힘은 창조주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둠이고 그분은 밝은 빛입니다. 우리는 병약하고 그분은 강건하십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그분은 한없이 부유하십니다. 우리는 허약하고 그분은 그런 우리를 지탱해주십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 (시편 18,2) 이 땅의 그 무엇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성혈의 간절한 분출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는 우리의 눈을 가릴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은총의 원천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신자들의 의무입니다. 특히 하느님 백성들을 영적으로 관리하고 섬기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우리의 사명을 의심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정말로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개개인의 비참함을 인정해야 하고,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승의 삶에서 우리가 악마를 완전히 이길 수 있도록 약속하시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대신에 그분은 우리에게 악마와 맞서 싸우라고 요구하십니다. 바오로 성인이 자신을 자만하지 못하게 하는 “육체의 가시”로부터 자유롭고 싶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2코린 12,9)

하느님의 권능은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분의 권능은 우리를 분투하게 이끄시고, 우리의 결점에 맞서 싸우도록 박차를 가하십니다. 비록 이 땅에서 순례하는 동안 완벽한 승리를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일매일 끊임없이 다시 시작되며, 스스로를 계속 새롭게 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죽음을 더불어 나누는 사람이 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 안에서 부활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사랑해야 하고, 또한 자기희생과 고행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낙관주의는 그저 달콤한 사탕발림도, “일이 잘 해결되리라”는 인간적인 낙관론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낙관주의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 속에서 이뤄지는 자유와 신앙에 대한 깨달음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낙관주의는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에게 계속 요구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참으로 노력하게 해줍니다.

우리의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비참함을 통해, 살과 피와 먼지로 이뤄진 인간인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나타나십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더 나아지려는 우리의 노력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순수해지기 위해, 우리의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온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주기 위해, 우리의 존재 자체가 끝없는 섬김이 되기 위해 애쓰는 노력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든, 한창 잘 나가는 순간을 살고 있든, 아니면 위기와 좌절의 순간에 있든 간에,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로 성인이 성령 강림 이후에 말했던 장엄하고도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주춧돌이자 구원자이시며 우리 삶의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 4,12)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들 가운데 아주 특별하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고 저는 곧잘 얘기해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혜의 선물입니다. 지혜의 선물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게 하고 그분의 현존하심에 기뻐하게 해줍니다. 그로 인해 지혜의 선물은 우리에게 하나의 관점(觀點)을 부여합니다. 우리는 그 관점을 통해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 삶의 여러 사건들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네 신앙은 변함없이 굳세게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며 세상과 그 역사를 묵상할 때 우리 주님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느낌과 똑같은 감정을 우리 가슴 속에 반드시 갖게 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그리스도인은 인간성 안에 숨 쉬는 모든 선한 것들을 무시해선 안 됩니다. 그 건강한 기쁨을 인정하거나 인간적인 열정과 이상에 함께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가 세상에서 발견하는 모든 선한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행동할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배려심으로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 정신의 깊이와 풍부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의 정신을 약화시키거나 인간 영혼의 고귀한 충동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진실되고 진정한 의미를 자각하고 실현함으로써 그러한 특성들을 더욱 성장시킵니다. 우리는 대중적인 행복만을 추구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당신이 사셨던 삶의 친밀함에 깊이 스며들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또한 같은 하느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알고 사랑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아울러 세 위격을 가지신, 한 분이신 하느님의 같은 사랑 안에서 천사들과 모든 인류를 사랑하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인간 본성의 가치와 존엄함을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대담한 모습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 자녀의 존엄함을 성취하기 위해 창조됐다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엄청나게 대담한 특징입니다. 그러한 확신은 우리를 초자연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주는 은총을 통해 가능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교 신앙이 구원의 약속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정말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한 일이었겠지요.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이 구원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피로 확증됐으며 성령의 지속적인 활동에 의해 다시금 확인되고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동방 교회의 위대한 박사들 중 한 명이 다음과 같이 설명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신앙 안에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투명한 물질이 한 줄기 빛을 받아 광채를 발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령에 의해 태어나 밝게 빛나게 된 영혼은 스스로 영적(靈的)이 되며, 은총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리웁니다. 성령으로부터 미래에 일어날 여러 사건들에 대한 지혜가 오며, 신비를 이해하게 되고, 은총 주심과 천국의 시민됨, 그리고 천사와의 대화 등과 같은 숨겨진 진실들을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기쁨이 찾아오며, 성령으로 인해 하느님 안에서 인내하고 하느님을 좋아하게 되며, 우리의 상상이 미치는 가장 고귀한 상태에 이르러 하느님과 같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존엄성의 위대함을 깨우치는 것은 겸손한 마음과 더불어 우리 안에 하나의 태도로 자리잡습니다. 그 존엄성이 주님의 은총을 받아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진정으로 엄청난 사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은 우리들 자신의 힘이 아니며 바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는 참으로 잊어선 안 되는 진실입니다. 만약 그 진리를 잊어버린다면, 우리 삶을 거룩하게 하는 일은 왜곡되어 주제넘는 오만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적 삶이 곧 무너져내릴 것이고, 그때 영혼은 스스로의 나약함과 비천함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묻습니다. “내가 거룩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내가 말하는 ‘거룩함’이 ‘나는 거룩함을 지니고 다니지만,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 줄 어느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면, 저는 거짓말쟁이에다가 자만심으로 가득 찬 인간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레위기 말씀처럼 ‘거룩함’이란 말을 ‘거룩하게 된 누군가’로 이해한다면, 저는 감히 제가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온 몸이 땅 끝에 사는 마지막 사람까지 드리워져 그 몸의 머리와 그 분 아래서 저도 함께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제3위격이신 성령을 사랑합시다. 여러분은 성령으로부터 격려나 비판의 거룩한 울림을 받습니다. 여러분 존재의 친밀함 속에서 그 거룩한 울림에 귀를 기울입시다. 여러분의 영혼에 쏟아진 그 빛을 받으며 이 세상을 걸어갑시다. 그러면 희망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벽한 평화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께서 주신 희망이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 안에서 매일매일 더욱더 크게 자라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