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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지켜지느냐 마느냐 하는 판에 하느님을 불쾌하게 해드리지 않기를 바라는 동시에 세상 사람들과도 충돌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느님과 세상은 대립관계입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희생은 모든 것이 타버리는 전번제(全播祭)여야 합니다. '남들이 어떻게 말할까'라는 걱정, 그리고 평판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다 태워버려야 합니다.
‘거룩한 뻔뻔스러움’은 복음 속에 매우 깊은 근거를 갖고 있음을 이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하느님의 뜻을 수행하십시오. 다음 일들을 깊이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곧 예수께서는 거짓으로 고발당하셨고, 예수께서는 침뱉음을 당하시며 얻어맞으셨고, 예수께서는 보잘것 없는 모임들 앞에 끌려나가셨으나···, 예수께서는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결심: 모욕을 당하더라도 참고, 굴욕감이 뒤따르리라는 것을 각오하고, 우리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우리들에게 맡기기를 원한 하느님의 일로 서 참으십시오.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행세하는 것에 두려움과 부끄러움 느끼고 그것에 진다면,우리가 저지르는 해악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생각만 하여도 무섭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느님이나 사도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자기변명의 필요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인간적인 덕행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굉장히 일그러졌고 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기쁘게 해 주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론(異論)을 제기하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양에게 좋은 것은 늑대에게는 나쁘다.”
‘위협'을 입에 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적 앞에서 겁을 먹는 사람들. 그대가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대는 그 사업을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협조하지 않기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거나 협력하고 있다고 생각되거나 하는 것조차 최대한 피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나 이상으로 좋게 보이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나 사람들로부터 좀더 일관된 삶을 살라는 요구를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본심 아닙니까.
충분히 단단한 결심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애인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펜을 들어보니 망설이는 마음에 지고 말았습니다.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졌습니다. 인간이므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 기분을 안다, 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주님의 요구에 부응하여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므로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고 알고 있지만, 이 세상에서의 사랑은 버려야할 목록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듯이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허약함으로 인해서, 즉 우리가 부서지기 쉬운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기는 하지만, 교회의 교리를 완전무결하게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용감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영웅적인 겸손의 마음으로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열심히 진리를 옹호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혹자는 신앙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무분별, 무모하다고 칭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을 미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나 남을 신뢰하는 것이 더 미친 것 같아보입니다.
그대는 편지로 저에게 말하기를 마침내 고해소에 들어가서 굴욕을 참고 한 인간 앞에서 당신 생활의 배설 구멍 —그대의 말입니다— 을 열어야 하는 수모를 경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언제가 되면 그런 자만심을 버리겠습니까. 그 자만심만 버리면 기름 부어진, 다른 하나의 그리스도 —그리스도 자신一 이며 그대에게 하느님의 용서인 사죄의 말씀을 주는 “그 사람”에게 가서 고백하고 기쁨에 넘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에서 인쇄된 문서 https://escriva.org/ko/book-subject/surco/2890/ (202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