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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는 인간적 존경를 주제로 하는 12 항이 있음.

세상 사람들은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희생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굉장한 희생에만 경탄하는 겁니다.

무종교주의, 중립주의. 이런 것들은 언제나 새롭게 보이려고 기를 쓰는 옛 신화들입니다. 

그대가 집에 들어갈 때 모자를 벗어 벽에 걸어놓듯이, 어느 가톨릭신자가 대학이나 협회, 모임, 혹은 국회에 들어갈 때 가톨릭신앙을 한쪽으로 제쳐놓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짓인지 생각해봤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성화의 면面은 이 세점으로 이루어집니다. 거룩한 고집, 거룩한 강요, 그리고 거룩한 뻔뻔함입니다.

거룩한 뻔뻔함은 세속적인 뻔뻔함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거룩한 뻔뻔함은 영적 어린이의 삶의 특징입니다. 어린이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지켜본다 해도 자신의 나약함, 천성적인 나약함을 천진스럽게 드러냅니다. 

그런 뻔뻔함을 초자연적 생활로 옮겨보면 이런 이론이 가능합니다. 칭찬은 경멸이고, 존경은 멸시이고, 명예는 수치이고, 건강은 병이고, 부유는 빈곤이고, 아름다움은 추함이다…. 

자, 좋습니다. 그것이… 어떻단 말입니까.

조롱당하는 것을 웃어넘기십시오. 뭐라고 하든 전혀 개의치 마십시오. 그대 안에서 그리고 그대 환경에서 하느님을 찾고 체험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머지 않아 그대는 그리스도인의 세련미를 지니고, 역설적이지만! 살아가는데 필요한 뻔뻔함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대가 거룩한 뻔뻔함을 지니고 있다면, 남들이 뭐라고 할까, 혹 뭐라고 했을까 하는 것이 그대에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조롱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그대는 내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돈에 너그럽지 못합니다. 말하기 좋아하고, 법석을 떨고, 약속과 계획은 곧 잘합니다. 그러나 희생이 요구되는 시점에 자신의 어깨를 내주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령 희사를 하더라도 춤, 복권, 영화, 쇼와 같은 어느 행사를 통해서 하거나, 혹은 신문지상에 발표하거나 기부금납부자 명단에 올리려 합니다” 

그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예외도 있습니다. 그대도 자선을 베풀 때는 자기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십시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 아닌가? 저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 아닌가? Nonne hic est fabri filius? Nonne hic est faber, filius Mariae?” 

예수께 대한 이 말. 그대가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려고 할 때, 하느님의 도구가 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대는 놀람과 조롱섞인 이 말을 들을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저 사람은 그 사람 아닌가…?”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하고 있는 일이 그대의 사명을 입증하게 하십시오.

신심행위에도 예절이 있습니다. 그것을 배우십시오. 매일 미사에 참례하면서도 미사 참례하는 법도 모르고 성호 긋는 법도 모르고(그들은 서둘러 묘한 몸짓을 합니다), 감실 앞에서 무릎 꿇는 법도 모르고(그들의 우스꽝스러운 장궤는 조롱처럼 보입니다), 성모님상 앞에서 공손히 머리 숙이는 법도 모르는 ‘경건한’ 사람들을 보는 것은 안타깝습니다.

다시 한번 그들은 말했고 글을 썼습니다. 찬성, 혹 반대. 좋은 의도로, 그리고 나쁜 의도로. 알랑거림과 중상모략, 칭찬과 박수갈채, 성공과 실패…. 

바보, 정말 바보! 그대가 목적지를 향해, 머리와 가슴을 하느님께 향하여 똑바로 가고 있다면, 휘이잉 하는 요란한 바람소리나 귀뚤귀뚤하는 귀뚜라미 소리, 혹은 음~메 하는 소리, 혹은 꿀꿀거리는 소리, 혹은 힝힝거리는 소리들을 왜 걱정하는 것입니까?

그 소리들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벌판에 문을 설치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