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24«밭고랑»에 사랑(애덕) → 애덕과 진실 항이 있음.

우정과 신뢰(터놓고 하는 이야기)의 사도직의 첫걸음은 이해하는 것, 섬기는 것, 그리고 교리면에서 성스러운 비타협 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남과의 의견 차이를 잘 표현할 줄 알아야 하지만 미움을 사지 않도록 애덕을 갖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항상 예의바르게 대하십시오. 당신은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하지만 스스로 당신의 반대자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실수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면 각별히 예의를 갖춰야 합니다.

설마하면서도 유감스럽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타인을 중상해, 정의에 반하면서, 그 후에, 애덕입니다, 성실입니다라고 지껄여대며, 중상의 희생자에게 자신의 변호를 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이외의 가톨릭 신자를 나쁘게 다루면서 입으로는 에큐메니즘(교회일치운동)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에큐메니즘만큼 슬픈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이나 혹은 일들에 자신들의 일그러진 렌즈를 통해 초점을 맞추고서, 심술궂은 뻔뻔스러움으로 비판을 가하거나 또는 감히 자신들의 충고를 제공할 때 그들은 객관성에 대한 무척이나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확고한 결심을 하십시다: 우리가 바로잡아 주거나 또는 충고를 해 줄 때 하느님 앞에서 말하고, 그리고 우리가 한 말을 우리들 자신의 행동에 적용합시다.

언제라도 한탄할 것임에 틀림없으니까, 상대가 누구든 중상으로 공격하는 방법은 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물며 교훈을 주기 위해서와 같은 동기를 구실로 삼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그런 동기를 내더라도 도덕적으로 나쁜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아니오’를 말하는 열 가지 방법 가운데서, 왜 그대는 언제나 가장 불쾌한 것을 택해야 합니까? 덕은 남을 해치지 않는 법입니다.

꾸짖는다? 많은 경우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점을 고치도록 가르칠 목적으로 그래야 합니다. 화를 잘 내는 성격의 방패막이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로잡을 때는 명료하고 부드럽게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미소를 잊지맙시다. 또 예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코 예의에 어긋나는 심한 방법이 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당신은 선과 절대적 진리를 보관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악을 송두리째 뽑을 개인적 직함과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사랑하는 분이 용서해 주신 것, 또 지금도 많이 용서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사랑으로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인간적인 선한 예의범절을 통해서 그대는 당신과 다른 누구와의 사이에 다리 놓을 수 없는 거리를 만들어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이 진리에서 더 멀리 벗어날 필요가 없도록 다른 사람들을 위해 출구를 하나 남겨 놓아야 합니다.

폭력은 어느 누군가를 이해시키기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사도직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난폭한 사람은 비록 그가 첫번 전투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언제나 지는 쪽에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외톨이가 되어 몰이해에 의해 갇혀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대가 왜 화가 났고 왜 실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사용한 것과 같은 무기로 보복만 당한 것이 아닙니까. 즉,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교훈으로 활용하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당신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해치거나 또는 애덕을 파괴하는 느닷없는 거부 따위에 의지하는 일 없이, 아니오라고 말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그대는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 앞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사람에 관해서 그리고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들에 관해서 우호적으로 말하는 습관을 들이고, 특히 그대가 하느님의 사업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 관해서 말할 때 그렇게 하십시오.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침묵을 지키십시오. 날카롭거나 또는 짜증나게 하는 비판은 뒷공론이나 비방을 초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더욱 전폭적으로 바친 한 청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제가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덜 이야기하고, 병자를 심방하고 마루바닥에서 잠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사제들에 관해서는 오직 그들을 칭찬하기 위해서만 말해야 합니다.

나를 포함해 모든 사제가 이 점을 깊이 생각하고 매일 처신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거짓말하는 데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과묵, 음모, 비방···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비겁한 자의 무기입니다.

당신 자신으로 하여금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말하는 첫번째 말이나 마지막 말에 의해 인상을 받도록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존경과 관심을 가지고 들으십시오. 사람들에게 상응하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나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그대의 판단을 심사숙고하십시오.

사람들은 뒤에서 험담하고 "이런 소문을 들었어"라고 말을 하게 만드는 것도 그 사람들입니다. 네, 확실히 미천한 방법입니다.그러나 평안을 잃지 않습니다. 당신이 옳은 뜻을 가지고 일하는 한 그들의 혀가 해롭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멍청하고, 이 얼마나 무식한 패거리인가. 형제에 대해, 특히 하느님에 대해 충성심이 결여되어 있는 것, 실로 심하지 않습니까.

반박할 권리를 잘못 해석하고 험담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 복음서의 권유에 따라 형제적 설유를 활용하십시오.

그런 어려움이나 구설수에 속썩이지 맙시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업에서 일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길을 가면 먼지가 날리는 법입니다.

당신을 곤란하게 하고 상처입히는 것을 스스로를 정화시키고 가꾸는 데 활용하십시오

험담하는 것은 극히 인간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반박합니다.

단 한 명의 악의적인 말이나 경박한 말이 여론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을 욕하는 유행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그 험담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자칫 응축돼 먹구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격을 받는 것이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구름은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주는 비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모욕하고 중상해 할 때 하느님은 그를 높여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