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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밭고랑»에 믿음(신덕) → 믿음에 용기 항이 있음.

이 지상(地上)에서 그대가 행복하려면 신앙과 순결, 그리고 주님이 제시하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꿋꿋함이 필요합니다.

산들바람은 폭풍과는 같지 않습니다. 누구나 최초의 것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놀이이고, 투쟁의 우스꽝스러운 흉내입니다.

약간의 어려움과 부족, 그리고 곤궁함 등은 기꺼이 참고 있다가 '이제는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증거로 십자가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대는 내적인 기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엾게도 폭풍이 닥치면 온 몸을 흔들어 백 년을 헤아리는 나무조차 쓰러지지 않을까 겁이 났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마음속의 두려움이 아니라, 밖에서 오는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신뢰의 마음을 깊이 가지십시오.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일치하는 한, 폭풍은 당신의 신앙과 사랑을 앗아가거나 길에서 내팽개칠 수는 없을 겁니다.

바보 같은 행동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알고, 사랑하고, 지켜야 할 진리를 매일 더 깊이 알고, 강하게 사랑하고, 더 강한 확신을 갖고 지키기를 원하더라도 그것은 절대로 광신이 아닙니다.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드리지만 거꾸로 거짓 자유의 이름으로 이 정도 행동을 반대하는 사람이야말로 당파 근성의 소유자입니다.

예수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노(No)라고 하는 것은, 곧 신앙의 진리를 부정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가톨릭 신자로 선언하는 그대는 예수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연구를 계속해 당신이 확신하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와 과학, ‘진리’와 생활 사이에 모순이 없는 것, 모순이 있을 수 없는 것을 나타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대는 제가 최근에 유행하는 경향을 고려하지 않고 똑같은 긴요한 일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되풀이하는 것을 반대합니까? 보십시오, 직선은 수세기 동안 똑같은 방법으로 정의되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간명한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정의들은 더 모호하고 복잡할 것입니다.

그대는 그대의 신앙이 요구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나, 최소한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깨달으면 그만큼 더 남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여러 세기가 지나가는데도 가톨릭 신앙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기 때문에 분파주의자들은 ‘광신(狂信)’이라고 부르고 아우성칩니다.

한편, 분파주의자들의 광신은 진리와는 관계가 없으므로 시대를 달리할 때는 그 겉옷을 바꿉니다. 그들은 사실에 바탕을 둔 내용이 결핍되어 있는 단순한 말뿐인 요괴를 성교회에 대항하여 쳐듭니다. 그들의 “자유”는 사람들을 속박하고, 그들의 “진보”는 인간성을 정글 속으로 되돌아가게 하며, 그들의 “과학”은 무지를 감춥니다. 그들의 좌석 뒤에는 단지 해묵은 망가진 물건들이 감춰져 있을 뿐입니다.

그대의 믿음을 위한 ‘광신(狂信)’이 매일같이 강해지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인 진리를 위한 유일무이한 방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 특히 지식인(인텔리)의 세계에서 여러 당파 공통의 지령과 같은 것이 중시되고 있으며, 이것이 명백히 감지되어 가톨릭 신자까지 이에 따를 때가 있습니다. 뻔뻔스럽게도 참을성 있게 중상을 계속하고, 그것을 펼쳐나가고, 모든 진리와 모든 논리에 어긋나면서도 교회와 사람에게, 또 조직에 대해 먹구름을 드리우는 것입니다.

매일 믿고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교회의 적을 표방하는 그들을 욕되게 하소서." 주여, 당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우리가 전파할 결심을 하고 있는 당신 빛의 밝기로 욕되게 하소서.

그리스도교는 ‘특이’하니, 그것은 이 세상의 것들과는 쉽사리 섞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현수막으로 사용될 때 아마도 가장 큰 ‘성가신 방해물’일 것입니다.

그대가 그대의 생활을 되돌아보고 그것이 그다지 대단치 않은 노력이나 업적들로 해서 표가 나지 않았을 때, 그대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였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보속과 더 큰 자기 봉헌을 가지고 회복할 수 있을가를 생각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