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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고랑»에는 사말(四末)를 주제로 하는 12 항이 있음.

하루 종일 불쾌한 마음으로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걱정거리입니다.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유일한 도피처인 잠마저 오래가지 않을거라며 잠들기 전부터 걱정합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고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데 짜증이 나고 실망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남겨진 것은 영원한 행복으로 가기 전의 첫걸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임을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기쁨을 누리며 걸음을 계속하는 자만이 그 행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 싸우고 있다면, 그는 매순간마다 자기 의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직면할 때는 조용해지십시오. 신앙이 없는 사람의 금욕주의적 냉정한 자세가 아닙니다. 생명이 바뀌는 것이지 빼앗겨 버리는 것이 아님을 아는 열정을 갖기를 원합니다. 죽는 것은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법학과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획득하였고, 마드리드 대학의 교수직을 신청 중이었습니다. 그는 두 가지의 대단히 힘든 주제를 전공하였고 두 가지를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그는 저에게 자기가 병이 났고, 제가 와서 자기를 만나달라고 말을 전해 왔습니다. 저는 그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신부님, 저는 죽어가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인사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애정어린 위로를 하였습니다. 그는 총고해를 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그날밤에 그는 죽었습니다.

건축가인 친구 하나와 의사 한 사람이 저를 도와 염을 했습니다. 순식간에 부패하기 시작한 저 젊은 육체를 바라보면서 우리 셋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가 방금 완성한 최종 학력에 비하면 두 박사학위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죽음 빼고는 다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은 모든 것을 해결한다.

죽음은 가차 없이 찾아옵니다. 많은 남녀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생을 마감할 때가 되어서도 이 세상이 떠나기 어렵고 괴로워합니다. 다른 사람은 아직 평생이 계속되기 때문에 지루하고 괴로워합니다. 어느 것도 이승에서의 행보를 목적 그 자체인 것처럼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버리고 영원한 논리에 닻을 내려야 합니다.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즉, 자기 자신과 덧없는 자기중심적 동기를 비우고 영원한 그리스도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대가 죽음에 관해서 생각할 때 그대의 죄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이미 그대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그대가 무슨 재료로 만들어졌는가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대가 주님을 찾는다면 주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환영한 그 아버지같이 그대를 환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영원한 도시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것을 잊을까바 죽음의 시간에, 이를테면 이해의 부족에서거나 또는 박해 중에서거나 또는 무시당하고 있는 중에 이 진리가 가끔 조잡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언제나 외로움의 느낌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들이 비록 애정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다 혼자서 죽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옭아매는 밧줄을 모두 버립시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 앞에서 영원히 살기 위해 항상 임종의 대비를 해둡시다.

시간은 우리들의 보물인, 영원을 사기 위한 ‘돈’입니다.

그대는, 생명이란 소모되어야 할 것이고, 하느님께 봉사하는 데 불태워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송두리째 주님을 위해 소모함은 죽음에서 풀려나는 방법이고, 죽음은 우리들에게 영생을 얻게 해 줍니다.

친구인 그 사제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손을 잡고, 또 사람들이 이런 소중한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그러니까 그 사제는 스스로에게 타이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가 죽더라도 모든 것은 순조로울 것이다. 하느님이 모두 돌봐주시니까.’

죽음을 그렇게 비극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사실 그렇지 않으니. 사랑을 물리친 자식만이 부모와의 만남을 반기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