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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친구들»에는 의도의 정직성를 주제로 하는 10 항이 있음.

“여우들을 잡아라, 저 작은 여우들을. 우리 포도밭을, 꽃이 한창인 우리 포도밭을 망치는 저것들을”(아가 2,15). 작은 일에도 모두 충실하고 또 충실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면, 성모 마리아의 두 팔을 향하여 자녀답게 달려가는 것 또한 배울 것입니다. 처음부터 여러분에게 상기시켰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아주 어립니다. 우리의 나이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로 결심한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참하고 나약하지만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위대함과 거룩한 순결 안에서 강한 힘을 찾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실화인데, 아주 오래전의 일이고 그 내용도 여러분의 성찰에 도움이 될 것이므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여러 교구에서 오신 사제들에게 피정 지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돕고 싶었던 저는 친구처럼 함께 이야기하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자고 초대하였습니다. 우리 사제들도 형제적 도움과 조언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가운데 한 사제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태도가 다소 거칠었지만 정직하고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마음 안에 있을 수 있는 어떠한 상처라도 치유해 보고자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그의 내면의 것을 끌어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갑자기 그는 이런 말로 저를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제 당나귀가 몹시도 부럽습니다. 그 녀석은 일곱 본당에서 일해 왔지만, 그 녀석에 대해서는 전혀 나쁘게 말하지 않습니다. 저한테도 그러면 참 좋을 텐데요!”

이제 진지하게 양심 성찰을 해보도록 합시다. 아마도 여러분이나 저는 그 시골 사제가 자신의 당나귀에 대해 보낸 찬사를 받을 자격은 없을 듯합니다. 우리는 아주 열심히 일하였고,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자신의 분야에서는 사람들이 보기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 어떤가요? 후회할 만한 일은 없나요? 참으로 하느님과 사람들을 섬기려고 열심히 노력했나요?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이기적인 계획과 개인적 영광과 야망을 추구하며 조만간 사라질 세속적 성공을 쫓아다닌 것은 아닌가요?

제가 다소 직설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저 자신도 다시 한 번 성실한 참회를 해보려는 것이고, 또 여러분도 각자 그렇게 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몸소 경험한 불성실함, 수많은 잘못, 나약함, 비겁함을 상기하면서,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참회의 기도를 바칩시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 저는 한 말씀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알고 계십니다. 저는 제 비참한 처지 덕분에 저의 힘이신 주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당신은 제 피신처’(시편 42,2)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출발합시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너무 관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경향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쉽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 또는 휴식이 충분한지에 대해서 지나친 걱정을 합니다. 물론 휴식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활력으로 일과 씨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 해 전에 이야기했듯이, “휴식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노력이 덜 요구되는 다른 활동들에 우리의 주의를 돌리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우리 어깨 위에 놓인 놀라운 책임들에 대하여 너무 느긋하고 그것들을 망각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우리는 또한 그릇된 합리화 속으로 숨으며 시간을 낭비합니다. 반면에 사탄과 그의 졸개들은 결코 쉬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예전에 노예였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이야기를 묵상해 봅시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기쁘게 섬기십시오”(에페 6,6-7).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주인에게 복종할 것을 촉구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마땅히 따라야 할 좋은 충고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께 빛을 주십사고 청합시다. 우리의 직업이 우리 자신의 성화 소명에 필요하고 또 유익한 것이 되도록 하는 그 신성한 의미를 매 순간 발견할 수 있게 도와주십사고 간절히 청합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마르 6,3)이라고 불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거룩한 자부심을 지니고 참으로 일하는 사람임을 행동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특사로 행동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일을 마치지 못한다면, 만일 다른 사람들보다 직업적으로 덜 노력하고 덜 희생한다면, 만일 부주의하고 믿음직하지 않으며 경박하고 무계획적인 사람으로 불린다면, 우리는 그분을 충실히 섬기는 것이 아님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덜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영성 생활과 관련된 다른 의무들도 성공적으로 이행하지 못할 것이며, 아마도 더 어려워할 것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루카 16,10).

“하느님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면서 밭을 갈고, 주님의 자비를 노래하면서 항해도 하고 장사도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과 결합됩니다. 전장의 참호에 웅크리고 있는 병사처럼 낯선 환경에 내던져졌을 때에도, 열성을 다한다면 주님 안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현존 안에 머물며 노력하고 또 노력하였을 것이므로, 여러분의 노력은 기도가 된다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인의 증거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직업의 인간적인 면과 관련해서는, 우리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일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당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 말대로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을 믿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지 않을 것이며, 얼굴을 붉히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탑을 세우려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되지 않아야 합니다.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9-30).

저를 믿으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초자연적 관점을 놓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일을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전에 마지막 돌을 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어떻게 언제나 나의 일을 완벽하게 이행하겠다는 정신으로 행동할 수 있지?’ 저 대신에 바오로 사도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이 사랑으로 이루어지게 하십시오”(1코린 16,13-14). 모든 일을 사랑을 위해서, 자유롭게 하십시오. 결코 두려워하지도 말고 타성에 젖지도 마십시오.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십시오.

제가 아주 좋아하는 시가 있습니다. 소박하지만 매우 인상적이어서 자꾸자꾸 읊조리게 됩니다.

나의 삶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네.

내가 만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하다면,

그것은 내가 많이 슬퍼하였기 때문이라네.

커다란 고통을 겪는 사람보다 더 사랑스러운 이는 없기에.

직업상의 일을 할 때에도 오직 사랑을 위하여 하십시오! 모든 일이 사랑을 위하여 이루어지게 하고, (비록 오해와 불의와 배은망덕과 실패의 쓴맛을 볼지라도, 여러분은 참으로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일이 빚어내는 기적의 결과, 넘치도록 풍요로운 결실, 영원의 약속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실수를 하지 않기 때문에 슬기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고치기 때문에 슬기로운 것입니다. 편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기보다 비록 스무 번 실패하더라도 거듭 도전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것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어리석게 돌진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터무니없이 무모하게 행동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할 것입니다.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좋은 일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사람, 흥분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국면을 전환시키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거의 본능적으로 우리는 그들을 신뢰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언제나 겸손하고 조용하게 올바른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음을 여는 덕목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슬기로움이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는 사회적 조화도 아니고 아무런 마찰 없는 평화도 아닙니다. 슬기로움의 바탕에는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겠다는 의지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유치하지 않고, 진리의 친구답게 똑바로 나아가며, 결코 방황하거나 천박하게 살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슬기로운 마음은 지식을 구합니다”(잠언 18,15). 하느님에게서 오는 그 지식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궁극적 지식이며, 모든 피조물에게 평화와 공감을, 그리고 각각의 영혼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지식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 넘어지는 고통을 겪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계속 움직일 힘을 새롭게 얻는다면, 넘어지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성인이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들에게는 겸손함과 거룩한 완고함이 있습니다. 잠언에 이르기를, ‘의인은 하루에 일곱 번 쓰러져도 일어난다.’(잠언 24,16 참조)고 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가엾은 피조물이기에 나약함과 타락을 경험하며 깜짝 놀라고 낙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용기를 얻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감사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 18,2). 주님 홀로 언제나 저의 힘이시요 피신처이시며 방패이십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내적 생활의 진보를 바란다면, 겸손하십시오. 끊임없이 신뢰심을 가지고 우리 주님께, 그리고 주님의 어머니시며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도움을 간청하십시오. 넘어진 상처가 아무리 심각할지라도 한 번 더 십자가를 끌어안고, 좌절하지 말고 조용히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저는 주님의 도움으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싸울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충실히 응답할 것입니다. 가파른 오르막길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하루하루 단조로운 일과도 감내할 것이며, 도중에 만나는 위험한 바위와 엉겅퀴들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저를 돕고 있으며, 이 길의 끝에서 끝없는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영원한 행복이 저를 기다리고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작가는 같은 꿈에서 세 번째 길을 발견합니다. 이 길은 두 번째 길과 마찬가지로 좁고 가파르며 바위투성이입니다. 이 길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무수한 역경 속에서도 엄숙하고 당당하게 걸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끝은 첫 번째 길과 마찬가지로 끔찍한 낭떠러지입니다. 이 여행자들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야심으로 하느님의 일을 오염시키고 거짓 지향과 헛된 열정을 지닌 위선자들입니다. “단지 존경을 받으려고 힘들고 고된 일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또한 오직 세속적 보상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인간적 이익을 위해서 덕을 실천하는 사람은 단지 몇 푼을 위해서 값을 헤아릴 수 없는 가보를 내다 파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일시적 명예를 얻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위선자들의 희망은 거미줄과 같다고 합니다.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해서 거미줄을 만들었지만, 결국은 죽음의 바람 한 줄기에 날아가 버립니다.”

이렇게 쉽지 않은 현실을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주는 이유는, 여러분 행동의 동기를 주의 깊게 성찰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고쳐야 할 것은 고치고, 모든 것이 하느님과 여러분의 동료들에게 봉사하도록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곁을 지나가셨음을, 지나가시면서 우리에게 사랑의 눈길을 주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2티모 1,9).

그러므로 여러분의 지향을 정화하십시오.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모든 일을 하고, 날마다 기쁜 마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십시오. 이러한 생각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저는 수천 번 되풀이하여 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단순히 어려움과 고통을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건 윤리적인 것이건) 견디는 단계를 넘어 그것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비롯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하느님께 봉헌한다면, 그것들이 우리를 괴롭히지는 않으리라고 장담합니다.

이제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는 더 이상 아무런 이름도 없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 구원자께서 몸소 그 십자가를 짊어지셨음을 알기에 위안을 받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협력하여야 합니다.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던 시몬은 마땅히 휴식을 누릴 자격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도와 자신의 어깨를 빌려드려야 했습니다(마르 15,21 참조). 사랑에 빠진 영혼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한 키레네 시몬이 되어, 그분의 고통받는 인성에 동참하고, 누더기 상태로 전락하는 것이 결코 불행이 아닙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과 가까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어 이 일을 하도록 선택하셨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덕분에 오푸스데이 안의 제 자녀들이 놀라운 기쁨을 누렸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기쁨이 확산되었습니다. 이 일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이야기하였고, 저는 이 명백한 진실에 대하여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다른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복은 그들이 결코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행에 직면하여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결점과 나약함에도 희생정신으로 살려고 날마다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길이 다른 사람들에게 더 쉽고 더 즐거운 것이 되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기꺼이 내어놓습니다.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가운데 여러분이 자신의 과거 행동을 되돌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불안하게 만들고 평화를 앗아간 원흉은, 거룩한 은총의 부르심에 맞갖게 살지 못했다는 자책이 아니었습니까? 또는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며 위선의 길을 걸어왔다는 자책인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에 대한 봉사를 단지 겉으로만 실천하는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대로 완전한 포기 속에서 자신을 끊고 제멋대로의 감정을 버리며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내어놓는 일을 내면에서는 거부하는 자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감실 앞에서 묵상하는 시간에는 단순히 사제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 이상의 일이 벌어집니다. 마치 그분이 각 개인의 내밀한 기도 안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몇 가지 제안과 지침을 주겠지만, 실제로 받아들이고 성찰하는 당사자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제가 제시하는 것들을 여러분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인격적이고 내적인 대화에 활용하고 여러분의 실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우리 주님께서 비추시는 빛 안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고, 주님 은총의 도움으로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온갖 좋은 일을 해 주신 우리 주님께 감사하며, 시편 저자와 함께 노래합시다.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오물 진창에서 들어 올리셨네. 반석 위에 내 발을 세우시고 내 발걸음을 든든하게 하셨네”(시편 40,3). 또한 여러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과 사악한 위선에 빠져 그릇된 길을 간 것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의 선익만을 열망한다고 말씀드리십시오. 이렇게 할 때에 여러분은 사실상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담대해지고 너그러워지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이상 우리 주님과 사람들을 속이지 않겠다고 선언하십시오.

지금 그 상황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감실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저는 살면서 제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특별한 방법으로 깨달았고,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기쁨을 체험하였습니다. 저는 하느님 사랑의 힘과 저의 비천함을 바탕으로 저 자신을 바로잡아 깨끗이 하고 하느님을 섬기며,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강조하건대, 우리는 그동안 우리를 안일함 속에 하게 살게 했던 무력함의 잠에서 깨어나 새롭게 되어야 하고, 더 깊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다시금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이 진리를 충만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에 기록되어 있듯이,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 중대하지 않습니까?”(1요한 5,9) 하느님의 증언은 어떤 내용일까요? 요한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3,1-2).

여러 해 동안 저는 이 즐거운 현실에 굳건히 의지해 왔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저의 기도는 비록 어조는 다양하더라도 언제나 똑같습니다. 저는 그분께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여기에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일 또는 저런 일을 제게 맡기셨고, 저는 주님께 의탁하였습니다. 저는 당신이 제 아버지이심을 알고 있으며, 어린 자녀들은 언제나 자신의 부모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제가 사제로 살면서 깨닫게 된 것은, 이처럼 하느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면 영혼은 강력하면서도 깊고 고요한 신심을 지니게 되며, 올바른 지향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