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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고랑»에는 의도의 정직성를 주제로 하는 18 항이 있음.

나만을 위한 시간을 잠깐이라도 남겨두고 싶다는 이런 유혹에 자주 사로잡힙니다. 그런 시시한 유혹에 속마음을 바로잡고 대처할 수 있도록 이번에는 어떻게든 해 보십시오.

만약에 당신 자신에 관한 생각들로 그대의 상상력이 넘쳐 흘러서 정상적으로는 그대의 도리에 어울리지 못할 환상적인 상황들과 환경들을 창출해 낸다면, 어리석게도 당신의 마음을 빗나가게 하고, 차갑게 해,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갈라놓을 것입니다. 이것이 허영입니다.

만약에 그대의 상상력이 남을 중심으로 돌아가면 그럴 사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남을 심판하는 결점에 빠져들 것입니다. 또한 남의 행동에 대해 객관적이지도 않고 비열한 해석을 내리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경솔한 판단입니다.

만약에 그대의 상상력이 당신 자신의 재능이나 말투, 혹은 다른 이가 그대에게 감탄하게 만드는 일에 집중된다면 강직한 의도를 잃고 자만심을 조장할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상상을 풀어헤치면 시간 낭비가 되고 상상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연이은 유혹에게 문을 열어 놓는 셈입니다.

단 하루도 내적 금욕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세상 끝날 듯 아욕을 추구하기 때문에 결국은 열심히 슬픈 삶을 사는 사람이 많은 이 세상에서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 거짓말 같습니다.

당신은 그런 슬픈 사람들 틈에 끼지 않기 위해서라도 매 순간 마음을 고쳐야 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자기네들 자신의 머리 속에 가지고 다니는 것 이외의 것은 아무 것에도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귀기울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라고 남들에게 요구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가 없는 사소한 거짓말을 했을 때 불안을-불쾌한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면 진리를 사랑한다고 믿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해로운 거짓말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니, 작다거나 무해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대는 그토록 비열한 의도를 가지고 보고 듣고 말합니까? 왜 타인의 의향 가운데가 아니라, 실은 그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나쁜 일들”을 타인의 마음속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것입니까?

읽는 사람이 바른 뜻으로 읽지 않는다면 쓴 사람의 바른 뜻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파벌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모든 활동에서 단지 파벌주의만을 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좁은 마음으로 자기 이웃을 잽니다.

저는 사무실에 있는 저 사람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그는 어떤 문제들이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짐작했고, 그것들은 결국 인생에서는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음에도 그가 그 문제들에 관해 들었을 때 깜짝놀라고 불쾌해했습니다. 자기가 마음 편히 남아있게 되도록 자기 자신의 시각의 그늘이나 황혼 속에서 살기 위해, 그는 그 문제들을 모르는 채로 남아있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충고하기를, 이 일들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마주 대해서, 바로 이 방법으로 그 일들이 제거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정말로 평화롭게 살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확언하였습니다.

그대는 문제들을, 당신 자신의 것들이건 다른 사람의 것들이건 간에, 그것들을 무시함으로써 해결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게으름과 안락 추구에 못지않는 것으로, 악마의 행동에 문을 열어 주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그대의 의무를 수행하였습니까? 그대는 올바른 의도를 지녔습니까? 그랬다구요? 그렇다면 만약에 자기네들 자신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악을 발견하는 뒤틀린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들에 따르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당신의 결심을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나빴던 것인지 조사하듯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는 확신을 갖고 대답했다. “저는 그것이 순수한 의향이었고, 그리고 많이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제 인생의 이유와 목적이십니다. 따라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게 제게는 분명해요.”

그대의 선의가 언제나 겸손과 함께하는가를 확인하십시오. 왜냐하면 선의는 가끔 거의 양보할 여력이 없는 가혹한 판단과, 모종의 개인적이거나, 국가적이거나, 또는 당파의 우월감과 함께 다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고상한 이유로 행동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이유가 ‘지배’했을 때의 행동은 얼마나 훌륭한 것입니까.

고된 일을 앞에 두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 친구가 물었습니다."여러분은 좋아서 열심히 일하시는 거냐고 했더니, 기쁨에 차서 침착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좋아해서 열심히 한다고요? 그런 동기로 일을 하다니, 너무 아깝습니다. 저희는 끊임없이 기다리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을 하는 겁니다.”

그대는 다음과 같은 극히 비그리스도교적인 비평을 들었을 때 매우 슬퍼했습니다. “네 원수들을 용서하라: 그대는 그것이 얼마나 그들을 성나게 하는지 상상도 못합니다!”

그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조용히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제 이웃을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사랑을 값싸게 만들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제가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하고, 저는 주님을 본받기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대의 그 근심거리들에 대한 치유책이 있습니다. "바로 인내와 올바른 생각을 갖고, 초자연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 나쁘게 말하는 것은 질투의 딸입니다. 그리고 질투는 불모(不毛)가 피난처를 구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불모증에 직면하고 있으니 그대가 사물을 보는 방법을 검토해 보십시오. 만약에 그대가 일을 계속하고, 역시 일을 하면서 결과를 얻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대하면서 괴로워지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당신 노력의 불모성은 단지 겉모양에서나 그럴뿐일 것입니다. 때가 되면 그대는 그 수확을 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