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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하느님의 친구들»에 예수 그리스도 → 겸손과 섬김의 모범 항이 있음.

이 강생의 신비를 묵상하며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5-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겸손을 본보기로 보여 주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진실로 깨닫는 것만이 하느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끌어올 수 있는 강력한 방법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모두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음식이 되시고자 굶주림을 겪으셨고, 우리의 음료가 되시고자 목마름을 겪으셨으며, 우리에게 불사의 옷을 입히시고자 죽음을 겪으셨고,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고자 가난을 겪으셨습니다.”

수난의 때가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왕직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기를 바라시고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메시아는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마태 21,5; 즈카 9,9).

이제 최후의 만찬 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작별하기에 앞서 모든 것을 준비하셨고, 반면에 제자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뽑힌 이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습니다”(요한 13,4-5).

주님께서는 한 번 더 몸소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교만와 허영에 휩싸여 논쟁에 빠져 있는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기꺼이 종이 하는 일을 하십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다시 식탁에 앉으시어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2-14). 우리 주님의 본보기에서 저는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분은 ‘만일 내가 이것을 한다면, 너희는 얼마나 더 많이 해야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제자들 눈높이에 맞추고, 그들에게 관대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사랑스럽게 책망하십니다.

처음에 열두 제자에게 하신 것처럼, 또한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 귀에 거듭거듭 속삭이십니다.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5). ‘내가 너희에게 겸손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나는 종이 되었다. 그러니 너희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이를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당신 사랑을 끝까지 퍼부어 주셨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바오로 사도께서 다시 한 번 그 답을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자녀 여러분, 그 신비에 대한 놀라움과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그 신비로부터 배우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권능, 위엄, 아름다움, 무한한 조화, 위대하고 측량할 수 없는 부유함을 그리스도의 인성 뒤로 감추셨습니다. 전능하신 분의 영광은 당분간 빛을 잃었고, 이로써 우리 피조물은 구원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놀랍게도 그분은 베들레헴에서 갓난아기로 첫 모습을 드러내셨고, 그다음에는 다른 어린이들과 똑같은 어린이로, 나중에 성전에서는 똑똑하고 총명한 열두 살 아이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따르는 열광적인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선생님으로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사랑의 자취들을 조금만 성찰해 보아도, 우리의 영혼은 그분의 너그러우심에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 영혼은 마치 불 위에 놓여 있듯이 따끔하지만 부드러운 인도를 받아 여러 번이나 옹졸하고 이기적이었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자신을 낮추시어, 부족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요 당신의 형제로 승격시켜 주십니다. 그분과 달리, 여러분과 저는 종종 어리석게도 주님께 받은 선물과 재능을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할 근거라도 되듯이 자랑합니다. 우리가 해낸 몇몇 성공적인 노력들이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 양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1코린 4,7)

하느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또 낮추시는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신비를 묵상하고 하느님을 본받을 수 있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겸손 앞에서 교만한 인간의 허영과 무례함은 끔찍한 죄악으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모범과는 정반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이신 그분이 자신을 낮추셨는데, 인간은 자신이 진흙으로 만들어진 가엾은 피조물임을 망각한 채 허망한 자기애에 빠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을 드높이려고 합니다.

관대함이 넘치는 정의 같은 사랑은 먼저 우리 자신의 의무를 완수할 것을 요구합니다. 첫째는 정의로워지는 것이고, 그다음 단계는 가장 공정한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위해서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더 많이, 더 넉넉히 배려하고 존중하며 친절히 대해야 합니다. 달리 표현한 것으로, 사도의 충고도 있습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갈라 6,2). 그러면 우리는 참으로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고, 예수님의 계명을 철저히 이행하게 될 것입니다.

정의와 사랑의 완전한 결합의 본보기로서 어머니들의 행동보다 더 뚜렷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동일한 정도의 애정으로 모든 자녀를 사랑합니다. 각 자녀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를 다르게, 다른 정의로써 양육하는 것도 그 동일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정의를 완성하고 충만하게 합니다. 각 사람들의 특정 상황에 맞추어 다르게 응답해야 합니다.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을 주고, 지식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지식을, 외로운 사람에게는 애정을 주어야 합니다. 정의에 따르면, 각자 자신의 몫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뜻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토피아적인 평등주의는 가장 극심한 불의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착한 어머니와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하려면 우리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 이상의 영예를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고 예수님께서도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영원한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싸우신 거룩한 주님께 우리 자신의 의지를 기꺼이 맡겨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삶보다 더 정의로운 길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