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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느님의 친구들»에 기도 → 단순하게 기도하다 항이 있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사랑이 아닌 그 어떤 것에도 속박을 거부합니다. 종교는, 동물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반항입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을 알 때까지는, 또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까지는 만족스럽지 않고 마음이 불안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자유롭게 해방된 반항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대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노예와 하느님의 자녀,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는 딜레마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와 교만의 노예, 관능의 노예, 이기심의 노예 가운데 우리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잘못된 선택으로 수많은 영혼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진리와 정의와 선의 길을 닦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저의 자유를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를 묶고 있던 수많은 사슬이 풀리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의미하고 터무니없는 일들, 사소한 욕망들에 신경을 쓰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값진 보물이요, ‘돼지들 앞에 던져서는 안 되는 진주’(마태 7,6 참조)인 자유를 우리는 전적으로 선행을 배우는 데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이사 1,17 참조).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의 방탕한 행동들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위축되거나 협박 또는 시기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을 온전히 이행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놀라운 용맹심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인간 존엄성의 충만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다른 곳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짐스러운 것이거나 어떤 한계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참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무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한 결정을 내릴 때에, 우리는 아무것도 잃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얻습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우리는 최고의 카드를 뽑았습니다. 만일 그것이 의심스럽다면, 우리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봅시다. 우리의 신앙이 보잘것없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거의 없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이 빈곤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그분의 어머니요 우리 어머니이신 분을 통해서 간청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자라나도록, 우리가 주님의 현존이 얼마나 달콤한지 맛볼 수 있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할 때에만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영원히 언제까지나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시 주님께 눈을 돌려봅시다. 토마스 사도에게 하신 예수님의 부드러운 질책이 여러분에게도 들릴 것입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이제 우리도 토마스 사도와 더불어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뉘우침 속에서 외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저는 절대적으로 당신을 주님으로 인정합니다. 지금부터, 저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언제나 주님의 가르침을 참으로 소중히 여길 것이며, 충실히 따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복음서의 한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아마도 제자들이 근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대담하게 질문하였습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 ’”(루카 11,2).

이 대답에서 놀라운 점은 어떤 것입니까? 제자들은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우리 주님께서는 평범한 대화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자비의 위대한 비밀, 곧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계시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아버지를 신뢰하며 그분과 대화하고 시간을 함께 보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안타깝게도 영혼 없는 찬양, 온갖 이론과 형식을 앞세우는 추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찬양은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과 일대일로 나누는 인격적 대화가 아니라 허공을 향한 막연한 외침일 뿐입니다. 그럴 때면 우리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교부는 이 성경 구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가 이 구절에서 이해하는 바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긴 시간 동안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말을 끝없이 늘어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우리 주님 자신이 과부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과부는 간절한 애원으로 불의한 재판관의 고집을 꺾었습니다. 또 다른 본보기는 한밤중에 먹을 것을 구하러 벗을 찾아간 사람입니다. 그는 우정 때문이 아니라 끈질긴 간청 덕분에 벗을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였던 것입니다(루카 11,5-8; 18,1-8 참조). 이 두 가지 본보기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끝없이 말을 늘어놓는 기도가 아니라, 필요한 것을 단순하게 끊임없이 간청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러분이 묵상을 해보려고 해도 집중을 하지 못해서 하느님과 대화를 할 수 없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또는 마치 사막에 있는 듯 마음이 메마르고, 어떠한 생각도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사랑하는 마음이 무뎌졌다면, 제 충고를 들어보십시오. 제가 그러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늘 하였던 일입니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 앞에 머무십시오. 그다음에는 이렇게 말하십시오. ‘주님, 저는 기도할 줄 모릅니다. 주님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순간, 여러분은 분명히 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