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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하느님의 친구들»에 기도 → 살아있는 기도와 활동적인 기도 항이 있음.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가운데 여러분이 자신의 과거 행동을 되돌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불안하게 만들고 평화를 앗아간 원흉은, 거룩한 은총의 부르심에 맞갖게 살지 못했다는 자책이 아니었습니까? 또는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며 위선의 길을 걸어왔다는 자책인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에 대한 봉사를 단지 겉으로만 실천하는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대로 완전한 포기 속에서 자신을 끊고 제멋대로의 감정을 버리며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내어놓는 일을 내면에서는 거부하는 자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감실 앞에서 묵상하는 시간에는 단순히 사제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 이상의 일이 벌어집니다. 마치 그분이 각 개인의 내밀한 기도 안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몇 가지 제안과 지침을 주겠지만, 실제로 받아들이고 성찰하는 당사자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제가 제시하는 것들을 여러분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인격적이고 내적인 대화에 활용하고 여러분의 실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우리 주님께서 비추시는 빛 안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고, 주님 은총의 도움으로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온갖 좋은 일을 해 주신 우리 주님께 감사하며, 시편 저자와 함께 노래합시다.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오물 진창에서 들어 올리셨네. 반석 위에 내 발을 세우시고 내 발걸음을 든든하게 하셨네”(시편 40,3). 또한 여러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과 사악한 위선에 빠져 그릇된 길을 간 것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의 선익만을 열망한다고 말씀드리십시오. 이렇게 할 때에 여러분은 사실상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담대해지고 너그러워지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이상 우리 주님과 사람들을 속이지 않겠다고 선언하십시오.

이제 하늘에 계신 복되신 어머니께 우리를 당신 팔로 안아 주시고 아드님의 자비를 얻어 주시도록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 실천 사항을 결심해 보십시오. 하느님과 여러분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발전을 가로막는 사소한 결점을, 비록 아픔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끊어버리십시오. 교만, 관능적 욕망, 그리고 초자연적 실재에 대한 불감증은 서로 힘을 모아 여러분에게 속삭일 것입니다. “그래?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하찮고 대수롭지 않은 일인가!” 유혹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그래, 이번에도 나는 거룩한 부르심에 나를 맡길 거야.” 사랑은 특별히 작은 일에서 드러나므로, 여러분은 옳은 결심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희생은, 비록 아무리 어려운 것일지라도, 대개는 아주 사소한 행위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심장 박동처럼 멈추지 않으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귀중합니다.

위대하고 특별한 사건의 영웅들 가운데 어머니는 얼마나 많이 있었을까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진정한 영웅인 어머니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화려하게 묘사되지도 않고, 신문이나 방송에서 주요 뉴스로 다루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을 포기하는 삶이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자신을 위한 시간, 자기표현이나 성공을 위한 기회들을 기꺼이 양보하여 자녀들에게 행복의 양탄자를 깔아 주는 삶이었습니다.

만일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유익한 결론들을 끊임없이 복음에서 얻을 수 없다면, 우리가 복음을 충분히 묵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다수는 아직 젊지만, 이미 성숙한 경지에 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삶에서 좋은 열매를 거두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기에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구원에 대하여 거룩한 열정을 지닌 우리는 살면서 희생정신을 실천하고, 주님께서 맡기신 재능으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지향에도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마르 12,13) 동맹군의 올가미에 걸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 동맹군은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기에 어떻게든 하느님의 권리를 옹호하려고 구성되었으나, 오히려 사악한 세력에 편승하여 이익을 좇고 믿음의 형제들, 함께 섬기는 구세주의 종들을 잡으려고 교활하게 덫을 놓고 있습니다.

지혜로워지고 언제나 단순하게 행동하십시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에게 가장 적합한 덕목입니다. 자연스럽게 말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십시오. 문제의 표면에 머물지 말고 뿌리까지 들어가십시오. 만일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닌 의무들을 인간답게 또 거룩하게 완수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생길 불쾌한 순간들을 예상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 덕목인 이 사랑은 때때로 익살스럽게 풍자되어 온 내용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그토록 끊임없이 선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사랑은 단지 선포해야 하는 주제일 뿐이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주위를 둘러본다면, 사랑은 단지 환상 속의 덕목일 뿐이라고 생각할 만한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자연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메마름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이고 강렬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영혼들 안에서 사랑이라는 첫 열매를 맺으시는 성령의 활동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갈라 6,2)라는 성 바오로 사도의 충고 말씀에 대하여, 교회 교부들 가운데 한 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선행이 미흡하여 아직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나약함을 쉽게 견딜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 안에서 자라게 하여 준 그 길이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저만치 밀쳐놓고 인도적 활동이나 사회사업에 먼저 투신한다면,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 이웃의 환자를 돌보느라 그리스도를 외면하지 맙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환자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예수님께 여러분의 시선을 맞추십시오. 그분은 변함없이 하느님이시지만 우리를 섬기시고자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리 2,6-7 참조). 오직 그분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따라감으로써만 우리는 값어치 있는 이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받는 이와의 동일시, 결합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분의 헌신적인 삶, 한없는 사랑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희생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궁극적 선택의 자리에 세우십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격리된 삶을 사는 것과, 다른 이들을 섬기는 데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아가 3,2). 저는 성읍뿐 아니라, 세상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모든 나라와 민족, 큰 도로와 샛길까지 영혼의 평화를 찾아다닐 것입니다. 저는 일상 업무들을 하는 가운데 아무런 장애도 없이 평화를 발견합니다. 장애가 되기는커녕, 일상 업무들은 제가 더욱더 사랑하고 더욱더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길이요 근거가 됩니다.

만일 누가 우리를 불러 세우고, 영혼의 새 어두운 밤과 낙담과 반대와 투쟁과 고난을 일으켜 공격한다면, 시편 작가가 우리의 입술과 마음에 이 말씀을 담아 줄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 내가 그와 함께 있으리라”(시편 91,15). 예수님, 당신의 십자가에 견주면 제 십자가는 그 어떤 가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상처 옆에 나란히 있는 저의 작은 긁힘은 그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무한하고 순수하며 지대한 사랑에 견주면, 당신께서 제 어깨에 얹으신 이 자그마한 슬픔이 그 어떤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 그리고 제 마음은 거룩한 굶주림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 주님께 말과 행동으로 고백합니다. “저희는 사랑 때문에 앓고 있습니다”(아가 5,8 참조).

우리 안에는 하느님을 향한 갈증이 있습니다. 그분의 눈물을 이해하려는 갈망, 그분의 미소와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이를 표현하는 최선의 방법은 다음의 성경 말씀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42,2). 그 영혼은 나아가 하느님 안에 잠기고, 신성을 부여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샘물을 마시려고 입을 벌리는 목마른 나그네가 됩니다(집회 26,1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