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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성체성사 → 애덕과 일치 항이 있음.

빵과 수확, 모든 인류가 함께하는 영성체 

우리가 지금 이야기했듯이 예수님은 씨 뿌리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으로 그 일을 계속해나가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상처 입은 손으로 곡식을 눌러서 당신의 성혈로 적셔 깨끗하게 하시고 순결하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정결해진 씨앗을 밭고랑에, 이 세상에 뿌리십니다. 그분은 씨앗을 하나하나 심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결실을 맺는 것을 증언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길 안에 있다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분의 성혈을 한껏 머금어 우리들 자신이 바람에 실려 뿌려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해야 합니다. 씨앗이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땅에 묻혀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싹이 돋아나고 곡식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곡식으로부터 빵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으로 그리스도의 성체로 변화하는 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다시 한번 씨 뿌리시는 분인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1코린 10,17)

씨가 뿌려지지 않으면 수확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아낌없이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야 하고, 그분을 갈망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사람들이 오래 견뎌온 굶주림을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입니다. 진실과 정의, 일치와 평화에 대한 굶주림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인 것이지요. ‘평화에 대한 굶주림’과 마주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에페 2,14) 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뇌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열망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일치를 염원하는 이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게” (요한 17,23)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아야만 합니다. 정의에 대한 굶주림은 인류를 하나로 조화롭게 해주는 원천(源泉)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그 원천이라 함은 곧 우리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이고 서로가 형제이며, 그러한 사실을 우리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화와 진리, 일치와 정의를 우리는 갈망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조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없애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애의 기적을 일으키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은총으로 그리스도교적 삶의 방식대로 살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서로 남의 짐을 져주며” (갈라 6,2)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율법의 완성이자 본질인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만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경우를 들어보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실 때 아마도 바람에 일렁이는 밀밭을 보고 계셨을 겁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마태 9, 37-38) 그런 다음 일꾼들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마태 20,12)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 충실하지 못한 일꾼이라면 요엘 예언자가 얘기했던 상황이 발생하고 말 것입니다. “들은 황폐해지고 땅은 통곡한다. 곡식 농사는 망하고 햇포도주는 말라 버렸으며 기름은 떨어졌다. 밀과 보리를 생각하며 농부들아, 질겁하여라. 포도나무를 가꾸는 자들아, 울부짖어라. 들의 수확이 다 망가졌다.” (요엘 1, 10-11)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가라지를 뽑고, 곡식을 거두고, 타작하고… 길고도 고된 노동입니다. 우리가 꾸준히 넉넉하게 일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수확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 안에서, 시간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누구도 예외라고 여길 수 없습니다. 오늘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경배하면서 아직 쉴 때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많습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 땅을 가꾸는 이는 양식이 넉넉하다.” (잠언 12,11) 이 말씀을 우리의 영적 삶에 적용해봅시다. 우리가 하느님의 땅을 일구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거룩한 사명에 충실하지 않다면,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도록 돕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체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런 수고도 들이지 않은 일에 가치를 부여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거룩한 성체를 사랑하고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곡식의 낱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죽어 풍성한 생명을 길러내 백 배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하고, 우리 주위 사람들의 걱정을 더불어 나누어야 합니다. 또한 용서하고 이해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聖心)’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법을 배울 것이고, 명확하게 그리고 애정을 다해 진리를 수호할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려면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삶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서 없애버려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의 안락함에 대한 집착, 이기심의 유혹, 모든 일에서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성향 같은 것이 바로 그런 장애물들입니다. 오직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재현할 때만 그분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밀알의 죽음을 체험할 때에만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일할 수 있고, 내부로부터 세상을 변화시켜 결실을 맺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