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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성체성사 → 그리스도의 희생 항이 있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성품성사를 통해 신자들 가운데 몇몇이 그들 영혼에 인호(印號)를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성사는 심오하고도 형언할 수 없는 성령의 감도(感導)하심으로 이뤄집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인호는 그들을 사제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합니다. 주님의 신비체인 교회의 머리이신 분,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직무 사제직’은 일반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직무 사제직’을 받은 사목자들은 하느님께 거룩한 희생 제사를 봉헌하며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을 축성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해주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관한 모든 것을” (히브 5,1: 불카타 성경) 가르치는 사목활동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사제는 오로지 하느님의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는 사제의 영역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눈에 띄고자 하는 그 어떤 욕망도 거부해야 합니다. 사제는 심리학자도, 사회학자도, 인류학자도 아닙니다. 그는 또 한 명의 그리스도이며, 형제들의 영혼을 돌봐야 하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만약 사제가 어떤 인간적 학문을 기반으로 하여 교의신학이나 윤리신학에 관해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인 척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슬픈 일일 겁니다. 만약 사제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제직의 업무에 진정으로 헌신한다면, 인간적 학문에 관해서는 자신이 아마추어나 관찰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척하는 피상적인 모습이 일부 순진한 독자와 청중들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는 곧 인간의 학문에 있어서도, 신학(神學)에 있어서도 무지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 일부 성직자들이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 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는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하려는 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 교회의 영적 목표를 세속적인 목표로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혹에 사제들이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거룩한 직무를 완수하지 못하게 되며,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잃게 될 것이고, 교회에 큰 혼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과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 자유를 극도로 방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시민사회에 혼란의 씨를 뿌리고 그들 스스로도 위험해질 것입니다. 성품성사는 신앙 안에서 형제들을 섬기는 초자연적인 성사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를 새로운 독재를 위한 세속적 도구로 변질시키려는 듯이 보입니다.

거룩한 미사에 “온전히 참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기도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미사야말로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란 사실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확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리 죄를 씻고, 우리가 정화되며,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경험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하나 됨을 체험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느님 사랑의 위대하심에 응답할 수 있을지, 아마도 한두 번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을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명료하게 설명한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보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답은 간단합니다. 모든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애정을 다해 미사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깊게 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요약한 희생제사, 미사성제 안에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미사 때 계속 이어지는 기도에서, 그리고 여러분 눈앞에 펼쳐지는 행동에서, 그 수많은 경우에 여러분이 보아온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립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다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 삶의 여러 모습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 모습들 가운데는 우리가 개선해야 하는 것들이 있고, 우리가 이겨내야 하는 악덕(惡德)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를 생각하며 우리가 발전시켜야 할 형제적 태도도 있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제대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우리의 청춘에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의 제대입니다. 미사는 기쁨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그리스도와 모든 성인들의 상징인 제대에 입을 맞출 때에 사랑, 감사, 그리고 기쁨이 드러납니다. 제대는 작은 평상(平床)이지만 거룩하게 마련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무한한 가치를 지닌 성사가 우리 앞에서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참회’는 우리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죄를 추상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죄와 연약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Kyrie, eleison, Christe, eleison)” 라고 반복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공로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면, 쓰라린 슬픔을 맛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자비로 인해 우리는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대영광송(Gloria)’이 바로 그것입니다.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시나이다.”

우리는 지금 성경 말씀에 귀 기울입니다. 독서와 복음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빛입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지력(智力)이 알아듣고 묵상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의지를 강하게 하고, 행동하려는 우리의 열망을 효과적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 성령의 일치 안에 모여 있는” 하나의 백성이므로 우리들 신앙의 일치를 확신하며 사도신경을 암송합니다.

이어서 봉헌입니다. 인간이 만든 빵과 포도주를 주님께 바칩니다. 참으로 미소한 제물이지만 기도와 함께 바쳐집니다. “주 하느님, 저희를 받아 주소서. 겸손한 마음과 속죄하는 마음으로 저희가 드리는 이 예물을 기쁘게 받아주소서. 주님, 오늘 저희가 봉헌하는 제물이 당신께 건네져 받아들여질 수 있게 하소서”. 그러고 나서 다시 한번 우리의 미소함을 되새기고,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모든 것이 깨끗해지고 정화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떠올립니다. “저는 제 손을 씻을 것입니다… 저는 주님 집의 아름다움을 사랑해왔습니다.”

방금 전 세수식(洗手式) 직전에 우리는 성령께 간구하였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드리는 이 희생제사를 축복하시기를 간청합니다. 손을 씻은 후 사제는 미사에 함께하는 모든 이들의 이름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받으소서, 거룩한 성삼이시여(Suscipe, Sancta Trinitas)”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과 부활과 승천을 기리며, 또한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을 기억하며 우리의 예물을 받아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봉헌된 이 제물이 모든 이들의 구원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사제는 신자들을 기도로 초대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바치는 이 제사를… (Orate, fratres,)” 왜냐하면 이 희생제물은 여러분의 것이기도 하고 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온 교회가 비치는 제물인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비록 미사에 참례한 사람이 많지 않더라도, 실제로 한 사람만 참석했거나 주례 사제 혼자만 있더라도, ‘형제 여러분 기도하십시오’라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미사는 보편적인 희생제사이자, 모든 종족과 국민과 민족과 나라를 구원하는 전례인 까닭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인들의 통공을 통해서 봉헌되는 모든 미사로부터 은총을 받습니다. 미사에 수천 명이 참석했든지, 아니면 딴생각만 하는 복사(服事) 소년 한 명만 있든지 간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어느 경우이건 하느님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과 땅이 같이 노래합니다. “거룩하시도다(Sanctus, Sanctus, Sanctus…)”

저는 천사들과 함께 경배하고 찬미합니다.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미사를 집전할 때 그들이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찬미하며 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서도 함께 계심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아주 친밀한 관계이시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동시에 그분의 성체와 성혈의 모친이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하느님이시며 완벽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자의 관여 없이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성모 마리아께 잉태되셨습니다. 예수님의 혈관에는 당신 어머니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바로 그 피가 갈바리아산에서, 그리고 미사에서 구원을 위한 희생제사에 봉헌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감사기도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인자하신 아버지”라고 부르며 감사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의 모든 지체들 즉, 교황과 우리 가족과 친구들, 동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가톨릭 신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의 사랑에서 그 누구도 배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구합니다. 또한 평생 동정이신 은총의 성모님과 그리스도를 처음 따르고 그분을 위해 순교한 이들을 떠올리며, 그분들과 우리의 일치를 되새깁니다.

“주님, 저희 봉사자들과 온 가족이 바치는 이 예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소서…” (Quam oblationem)… 성체축성(聖體祝聖)의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이제 미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사제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바뀌는 실체변화(實體變化)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기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 순간이 다시 왔습니다. 이때, 아무것도 당신과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우리 주님께 말씀드립시다. 언어는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 손에 놓아주실 때, 빵과 포도주라는 약한 모습으로 무방비로 놓아주실 때, 주님은 우리를 기꺼이 당신을 섬기는 종으로 만드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주님께 말씀드립시다.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더 많은 기도가 이어집니다. 주님께 간청해야 할 것들의 절실함을 거의 매 순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떠난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한 우리들 자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충실함의 부족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그 무게는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견디시며,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감사기도는 복되신 삼위일체께 드리는 또 다른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per ipsum, et cum ipso, et in ipso.)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앞에서 우리는 나인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물론 다른 예들도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장면들로 넘쳐나니까요. 각각의 사건들마다 벗이 아파할 때 함께 고통받는 한 인간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된 교회는 상처 입으신 성심으로부터 태어났다네.” 활짝 열린 이 예수 성심으로부터 생명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비록 잠시 지나치는 생각일지라도 여기서 우리는 성사(聖事)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사들을 통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힘을 우리가 더불어 나누도록 해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체성사를 떠올릴 때마다 어떻게 특별히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성체성사는 갈바리아산의 거룩한 희생이며, 동시에 그 거룩한 희생이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 피 흘리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었고, 그 힘이 우리 영혼을 가득 채우며, 우리의 모든 활동과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방식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스도의 성심은 곧 그리스도인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를 내어놓을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러한 ‘자기 증여’의 원천은 단순히 우리들 자신의 열망이나 노력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망과 노력은 수시로 흔들리고 허약하니까요. 자신을 내어주는 삶은 우리에게 주신 은총으로부터 힘을 얻습니다. 그 은총은 인간을 만드신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마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내적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결코 낙담하거나 의기소침해선 안 됩니다. 저는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일상 삶에서, 가장 소박한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지 생각해달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해 살아가는 인간 행동의 본질이 바로 그 물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학적 미덕들을 실천해가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은 기쁨과 힘과 평화를 찾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의 결실입니다. 그분의 성심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해봅시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거룩한 신비입니다. 성부와 성령을 향한 성자의 사랑 또한 불가해합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를 이어주는 사랑의 끈이신 성령께서는 말씀 안에서 인간의 마음과 만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이런 핵심적 요소들을 얘기할 때면, 우리들 사고(思考)의 한계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계시(啓示)의 위대함을 함께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을 한참 넘어서는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겸허하고 확고하게 이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증거들을 통해 진리임을 압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마음 깊이 계신 사랑이 인간에게 내리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 성심 안에 계신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