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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담금질»에는 수덕 투쟁를 주제로 하는 108 항이 있음.

하느님께 선택받는 것은 거룩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또 그것을 요구합니다.

그대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그대의 삶-가련한 삶-은 인류 역사에 깊고 넓은 고랑을 남길 것입니다. 뚜렷하고 기름지며 영원하고 신적인 고랑을 말입니다.

성인이 되어야 할 그대의 책무를 날마다 의식하십시오. 성인! 성인이 된다는 것은 이상한 것을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 삶에 정진하고 책무를 끝까지 올바로 영웅적으로 이행하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거창한 일들에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그대의 초자연적 삶의 불꽃이 절대로 꺼지지 않도록 힘써 노력하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대를 부르시는 곳 어디에서나, 가장 낮은 데서나 가장 높은 데서나, 그대 자신을 끝까지 불사르며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 사랑을 행동으로, 당신의 온 생애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대는 어떤가요?

그대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영혼들을 하느님께 데려가야 한다는 부담스럽지만 복된 그 일을 반드시 의식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을 대명제로 삼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중간한 길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열함, 치사한 타협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대의 길을 위한 처방전은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참회하십시오. 그대의 의무를 사랑으로 이행하는 일을 쉬지 않고 행하십시오.

저의 하느님!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소서! 저희 하느님! 기도하는 법을 알려 주소서!

우리는 겸손으로, 항구한 기도로, 올곧은 행동과 깨끗한 생활로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청해야 합니다.

그대는 내게 그대의 영혼을 덮친 그 거룩한 열정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지요.

나는 서둘러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런 갈망을 그대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주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동행이 되기를 갈망하며 성령을 알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성령을 더욱 잘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가 내적 삶을 살도록 성령께서 그대의 영혼에 거처하심에 대해 감사드리게 될 것입니다.

제단의 거룩한 희생 제사가 참으로 그대의 내적 삶의 중심이자 뿌리가 되도록 부단히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그대의 하루 전체가 예배 행위로 바뀔 것입니다. 그대가 참여한 미사의 연장이 되고 그다음을 위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그대의 하루 전체가 화살기도와 성체 조배, 그리고 직장 일과 가정생활의 봉헌으로 충만한 예배가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대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한가운데서 가야 할 길을 분명히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이름 없는 사람이 되어 가장 먼 구석에서 아무도 모르게-오직 하느님과 그대만이 알게-일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종종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비록 끝에 가서는 그것이 편함을 찾는 길이라고 인정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선교사로 일한다는 생각과는 별개로, 단지 그렇게 남모르는 희생적 삶을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그대 마음에 떠오른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거룩하고 자연스러운 책무들을 수행하는 것은 그대의 소명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그런 책무들에서 벗어나 수도 단체에 “숨으려” 한다면 그대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평화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그대의 뜻을 행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대의 ‘성소’는 의무 불이행이라는 다른 이름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신성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전투를 마주하기를 순전히 인간적으로 꺼리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될 일입니다!

거룩한 정결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큰 어려움에 노출돼 있습니다. 그 위험은 영적인 생활에서나 직업 생활에서 안일함에 빠져드는 위험입니다. 그 위험은─하느님께서 혼인 성소를 주신 이들에게도 실제적인 것으로─감정 없는 노총각이 되고 이기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위험에 한 치도 양보하지 말고 필사적으로 맞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늘 이 작은 나귀 곧 우리 육신에 대해 참고 살아야 할 것이기에, 관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그리고 너그럽게 작은 고행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물론 때로는 큰 고행들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지켜보시는 일을 절대로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대의 정결을 죄에 떨어지는 일이나 그런 기회를 피하는 데에 국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결은 절대로 냉소적이고 산술적인 부정일 수가 없습니다.

정결은 덕이며 그러하기에 성장하고 더 완전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대는 깨닫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그대의 처지에 맞게 절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영웅적인 덕행으로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그윽한 향기는 또한 우리의 깨끗한 삶의 향기이기도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각자의 처지에서 저마다 가꾸어야 하는 그 정결의 향기이기도 합니다. 기뻐하며 긍정하는 거룩한 순결의 향기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견실하면서도 온화하며 품위가 있어서 부적절한 말들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수호천사들에게 지켜 주시도록 미리 감사를 드리십시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이름이 있습니다. 초기부터 사용되어 온 그 이름은 ‘하느님을 모시고 다니는 이’입니다.

그대는 실제로 그 놀라운 이름으로 불릴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하느님을 모시는 이답게 처신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그대의 처신을 바로 하십시오.

각각의 사건이나 환경 뒤에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십시오. 그러면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고 하느님께 응답하려는 더욱 큰 갈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를 기다리시면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우리가 한 결심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부정하며 자신을 잊고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걷고자 하는 실제적인 지향을 날마다 새롭게 하여, 우리의 이 비참함을 하느님의 내밀하고 영원한 위대함으로 바꾸십시오.

주님! 저를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삼아 주시어, 제아무리 거룩한 사랑이라도 당신의 상처 입은 성심을 통하지 않고서는 제 마음을 차지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사려 깊고 예의 바르도록 노력하십시오. 무례하지 마십시오!

사려 깊도록 노력한다는 것은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인! 하느님의 자녀라면 지나치도록 덕을 실천해야 합니다. ‘지나침’이라는 표현을 여기서 써도 괜찮다면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마치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듯이, 그 사람 안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목표를 매우 높게 잡아야만 다른 사람들이 중간 정도로라도 도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대 마음속에 악에 기울어지는 성향을 보게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악에 기울어지는 성향은 평생 그대 곁에 있을 것입니다. 이 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이 성향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사, 신심 생활, 거룩한 일이 그것입니다.

인내하며 그 수단들을 활용하십시오. 낙담하지 말고 거듭거듭 시작할 준비를 늘 하십시오.

주님, 저 자신에게서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규칙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사도는 반드시 미지근해지고…그다음에는 사도이기를 그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지금부터 제가 다른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더는 “내”가 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서 제게 바라시는 “그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당신께서 저에게 요청하시는 그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기도하는 법을 알게 해주십시오. 고난을 겪는 법을 알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영광 외에는 어떤 것도 염려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언제나 당신의 현존을 느끼게 해주십시오.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저의 예수님, 항구한 친교 안에서 당신을 갈망하게 해주십시오. 성령께서는 제게 불을 놓으십시오.

주님께서 그대에게 말씀하셨지요. “너는 나의 것”이라고.

지극히 아름다우시고 지극히 지혜로우시며 지극히 빛나시며 지극히 선하신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그대가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그대가 그분께 응답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그대의 삶에서 성 바오로가 언급한 그 무게에 짓눌린다고 느끼더라도 놀라서는 안 됩니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어머니께 의탁하십시오. 그분은 또한 그대의 어머니이십니다. 이분들은 절대로 그대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영적 지도에서 듣는 조언을 마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듣는 조언처럼 받아들이십시오.

그대는 나날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길을 제시해 달라고 요청했지요. 마음을 열고 무엇보다 먼저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은 것을 털어놓으라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마귀는 늘 패배할 것입니다.

그대 영혼을 활짝 여십시오. 확실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말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사랑의 광채가 그대 영혼의 마지막 구석까지 도달해 비출 것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말 못 하게 하는 마귀가 그대 영혼에 들어온다면, 그 마귀는 온갖 것을 망쳐 놓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대가 그 마귀를 즉각 제거해 버린다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입니다. 그대는 기쁘게 해나갈 것이고 모든 것이 좋아질 것입니다.

영적 지도를 받을 때는 (언제나 예의를 갖추면서) “야만스러울 정도로 솔직하도록” 굳게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 솔직함은 즉각적이어야 합니다.

그대의 영적 지도자를 사랑하고 그분에게서 도움을 찾으십시오. 영적 지도를 받을 때는 치유를 갈망하면서 아주 솔직하게 그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대 마음이 부패했으면 부패한 그대로를 보이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부패를 절대로 제거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그대가 겉으로만 그 상처를 깨끗하게 해주는 사람에게 간다면, 그대는 겁쟁이입니다. 진실을 감추고 가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에게 해가 될 따름입니다.

진실을 말하기를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때로는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낫다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게을러서, 편한 게 좋아서, 또는 겁이 나서 침묵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대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곧 그리스도의 자비롭고 온화한 사랑을 사방에 전파할 때, 서로 지탱해 주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넘어지려고 하는 사람은 이 형제적 힘을 통해 하느님께 충실하도록 자신을 지탱하고 격려해주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누구에게나 매력을 주는 성화의 길을 닦으려고 열망하면서 고행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세밀하게 실천하십시오. 때로는 미소 한 번이 회개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대는 하루하루 기쁘고 분별 있게 그리고 너그러이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고 그들이 더욱 기쁜 삶을 누리도록 성가신 일을 마다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대는 어디에서나 내면의 삶에서 나오는 ‘좋은 유머’ 곧 쾌활함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대화가 그대를 중심으로 맴돌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고행입니다. 그대는 이것을 실천하십시오.

양심 성찰을 위한 좋은 방법을 알려 드리지요.

오늘 내게 하느님의 손길로부터 왔거나, 동료들의 처신에서 비롯했거나 혹은 나의 나약함에서 온 어려운 일들을 속죄의 정신으로 받아들였는가?

수많이 그분을 상하게 해드렸다고 느끼는 그 슬픔을 우리 주님께 속죄로 바쳐드렸는가? 덕행의 길에서 거의 진보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내적인 지독한 당혹함과 치욕에서 나오는 부끄러움을 그분께 바쳐드렸는가?

습관적이고 관례로 하는 고행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늘 똑같은 고행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고행의 정신은 변함없고 습관적이고 관례적이어야 합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 그분의 옷차림을 하고 그분과 같아지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신앙을 활기차게 하십시오. 희생과 봉사로 가득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방해가 되는 온갖 것을 제거해 버리십시오.

성덕은 이완과 수축이 자유로운 근육과 같이 유연함을 지닙니다. 성인이 되고자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고행을 실천하면서도, 힘들다고 여기는 다른 어떤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닌 한, 그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편한 마음으로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다르게 행동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넝마 인형처럼 경직되고 생기 없게 될 위험을 무릅쓰게 될 것입니다.

성덕은 골판지처럼 뻣뻣하지 않습니다. 성덕은 미소 지을 줄 압니다. 양보할 줄 압니다. 그리고 희망할 줄 압니다. 성덕은 삶입니다. 초자연적인 삶입니다.

어머니! 저를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당신 아드님을 찾아내 꼭 만나 뵙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저의 전 존재로 그분을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저를 잊지 마소서, 성모님,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시야가 흐릴 때, 눈이 침침할 때, 우리는 빛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세상의 빛이며 병자들을 치유하러 오셨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러하기에 그대의 약함과 비참함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라면, 그대를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합니다.

비참함에서 나는 친구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그냥 내버려 두신 채 내 곁을 지나치시는 것 같다고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곧 나는 생각을 바꾸었고, 죄송스러웠습니다. 저는 신뢰하며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의 사랑이신 분, 그게 아닙니다.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온 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다시는 떨어져 나오지 않겠습니다!

나는 얼마나 비열하게 처신했으며 또 하느님의 은총에 얼마나 불성실했던가.

어머니, 죄인들의 피난처, 저를 위해 빌어 주시어, 하느님께서 제 영혼 안에서 하시는 활동을 제가 다시는 절대로 방해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토록 오랜 세월을 그렇게 그리스도께 가까이했건만 그런데도 그와 같은 죄인이라니요!

그대를 위한 예수님의 저 친밀한 사랑이 그대를 감동하게 해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습니까?

내게 참다운 기쁨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하지만 나의 부당함을 쓰라리게 인식하기에 성 바오로와 함께 “나는 얼마나 가련한 자입니까!” 하고 외치는 것이 마땅할 따름입니다.

그대 자신이 만든 모든 장애를 완전히 무너뜨리고자 하는 그대의 갈망을 키워야 할 때가 바로 그때입니다.

그대에게 여러 결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더라도 놀라워하거나 낙담하지 마십시오. 그런 결점이란!

그 결점들을 없애도록 분투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 약한 점들을 모두 깨닫는 것이 좋은 일임을 확신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교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만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합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경탄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대의 가련한 육신, 그대의 비참한 육신의 그 모든 무게를, 그대를 이루고 있는 그 가련한 흙덩어리의 그 모든 비열함을 의식할 때도 경탄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때에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저 부르심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를 이해하시고 저를 돌보십니다. 그분은 저의 형님이자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삶은 행복합니다. 아주 행복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그대는 슬픔이 할퀴고 간 자리에 고통을 느낍니다. 고달픔을 거의 항상 피부로 실감합니다.

이렇게 기쁨과 슬픔은 각자 자신의 “인간” 안에서 나란히 갈 수 있습니다. 기쁨은 새 인간 안에서, 슬픔은 옛 인간 안에서.

겸손은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데서 생겨납니다.

주님, 당신께 선물을 하나 청합니다. 사랑, 저를 깨끗하게 해주는 사랑을 선물로 원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선물도 청합니다. 제가 겸손으로 충만하도록 저 자신을 아는 선물 말입니다.

성인들은 삶이 다할 때까지 올곧게 분투하는 사람들입니다. 비틀거리고 쓰러질 때마다 늘 일어서고, 겸손과 사랑과 희망으로 다시 한번 자기 길을 용기 있게 나서는 사람들입니다.

그대가 저지른 잘못들이 그대를 더욱 겸손하게 하고, 그대에게 하느님의 도우심의 손길로 더욱 시급하게 이르도록 한다면, 그것들이 성덕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 복된 탓이여!” 하고 교회는 노래합니다.

기도는-나의 기도조차도-전능합니다.

겸손은 각 영혼에 자신의 결함을 보고 상심하지 말도록 가르칩니다.

참된 겸손은 용서를 청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주님께 간구하십시오. 참회의 정신으로 날마다 자기를 극복하게 해달라고 청하십시오. 그리고 이 끊임없는 승리를 겸손하게 그리고 항구하게 인내하면서 봉헌하십시오.

개인적으로 기도하면서 육체의 약함을 체험할 때마다 이렇게 되풀이하십시오. “주님 저의 이 가련한 육신이 지칠 때나 반란을 일으킬 때 십자가를 주십시오.”

저 사제가 설교한 말이 얼마나 맞는지요. “예수님께서는 저의 배은망덕함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은 저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많이 사랑하였기에, 그녀가 엄청나게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면, 저는 더 많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제게는 갚아야 할 얼마나 큰 사랑이 빚이 있는지요.”

주님, 미친 듯이 영웅적인 덕행을 실천하도록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설사 제가 당신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주님 은총의 도움으로 저는 절대로 다시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자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즉각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했기에 살아났습니다. 만일 그가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바로 다시 죽었을 터입니다.

진심 어린 결심: 언제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고, 하느님 안에 희망을 두며, 언제나 하느님을 사랑하기. 설령 우리가 라자로처럼 썩어 부패하고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기에.

그리스도인의 이 사랑스러운 모순을 경탄합시다. 하느님 안에서 피신처를 찾고 “하느님처럼” 되도록 우리를 이끄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비참함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분과 함께 우리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넘어졌을 때 또는 비참함의 무게에 짓눌려 있을 때, 그대는 굳센 희망으로 이렇게 반복하십시오. ‘제가 얼마나 아픈지를 주님 보십시오. 그리고 오셔서 저를 치유해 주십시오, 주님. 당신은 저에 대한 사랑에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까.’

확신에 차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지극히 사랑에 찬 성심께 계속해서 소리쳐 부르십시오. 그분께서는 그대를 낫게 해 주실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나병 환자들을 고쳐주셨듯이 말입니다.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절대로 달아나지 않겠다는 더 큰 열망을 날마다 지니십시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어머니, 저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저의 가련한 마음이 얼마나 눈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보십시오. 저는 저의 하느님 마음을 상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압니다. 그리고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등의 가치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보잘것없음과 외로움의 무게가 저를 너무나 짓누릅니다! 하지만…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감미로운 귀부인이신 어머니와 저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절대로 저를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의 육신이 반란을 일으키고 저의 믿음을 거슬러 온갖 방식으로 악마가 논증을 펼치더라도,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고 믿습니다.

성 바오로의 권고를 따르십시오. “지금이 일할 때입니다.” 안으로는 그대의 영혼을 도야하고 밖으로는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일할 때입니다. 그대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대는 뉘우치면서 내게 말했습니다. “저 자신이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너무나 어리석고 욕심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한 일이라곤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 여기서 시작입니다. 시작이요. 언제나 방금 시작이지요. 그렇지만 날마다 마음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의 그런 노력을 축복해 주시기를!

신부님, 신부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지요. “저는 많은 오류를 범했습니다.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압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아시고 고려하시는 주 하느님께서는 다만 그대가 겸손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아 날마다 당신을 더욱 잘 섬기도록 분투하기를 바라실 따름입니다. 더욱 내적인 삶을 통해서, 끊임없는 기도와 신심 행위를 통해서 또 그대의 일을 성화하는 데 적합한 수단을 활용함으로써 말입니다.

그대가 당나귀의 덕들을 얻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대가 그 덕들을 이루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압니다. 당나귀는 겸손하고 열심히 일하며 고집스럽게 인내하며 성실하며 발걸음이 확실하며 강합니다. 주인이 좋으면 고마워하며 고분고분합니다.

그대의 관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대의 첫 번째 관심은 그대 자신, 그대의 내적 삶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대에게 제안하신 저 고행이 얼마나 힘겹겠습니까! 찬찬히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그 속죄 행위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이 열망이 어떤 영혼의 지성과 마음과 입술에 새로운 빛으로 거듭 와 닿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가 혼잣말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그 길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자신을 거스르는 길, 자신을 부정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간절하게 탄원했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골고타를 생각하면 우리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아파하지 않을 수 없으며, 다시는 그분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겠다는 더욱 성숙하고 깊은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이나 나무를 조각할 때처럼, 우리는 날마다 회개의 정신으로, 또 작은 고행들로써 우리 삶의 모난 부분들을 조금씩 더 다듬고 결점들을 없애야 합니다. 고행에는 능동적인 고행과 수동적인 고행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능동적 고행은 작은 꽃들을 모으듯이 하루 동안 자발적으로 찾아서 하는 고행입니다. 수동적 고행은 외부에서 오는 것인데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지만 부족한 것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그대가 그대의 전부를 너그러이 그리고 기쁘게 내놓는다면, 그대는 얼마나 놀랍게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두 팔을 활짝 벌리신 채 그대에게 끊임없이 사랑의 적선을 청하십니다.

그대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께 다가가십시오. 골고타 정상에서 윤곽을 드러낸 저 십자가에 다가가십시오.

하지만 신실한 마음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상인 저 내적 평정을 지니고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신 분이 겪으신 그 수난의 사건들이 그대의 영혼을 관통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하신 수난 때에 지니신 바로 그 감정으로 고행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행은 모든 사도직을 위한, 각 사도직의 완전한 실행을 위한 필수 전제입니다.

참회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인생 여정에서 날마다 발견하는 수많은 사소한 것들, 곧 행동, 포기, 희생, 봉사 같은 것들을 이용하여 그것들을 사랑과 회개의 행위, 고행으로 바꾸어 마지막 날에 꽃다발로, 하느님께 바치는 아름다운 꽃다발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최상의 희생정신은, 열정적으로 시작한 일이거나 아니면 언덕을 올라가는 힘겨운 일이거나 간에, 시작한 일에 항구하게 인내하는 것입니다.

고행에 대한 그대 계획을 영적 지도자가 조절하는 대로 따르십시오.

하지만 고행을 조절하는 것이 언제나 고행을 줄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적합하다고 보면 늘릴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영적 지도자의 조언을 받아들이십시오.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거룩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성사들 안에서 그리고 끊임없는 수덕적 투쟁으로 우리가 받는 은총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영혼에 거처하십니다.

아들이여, 착각은 하지 맙시다. 그대와 나, 곧 우리는 언제나, 우리 삶을 마칠 때까지 늘 싸워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평화를 주게 될 것이고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파라클리토 성령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그치지 마십시오. 그분 말씀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대여! 기도할 때, 그대에게 하느님의 자녀임을 깊이 깨닫게 해줄 수 있는 저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십시오. 그대는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사랑으로 가득 차지 않았던가요. 전에 그대가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께 갔음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을 그대는 벗으로 형제로 연인으로 경배하지 않습니까.

이 충고를 받아들인 뒤에 그대는 이 순간까지 성령께서 그대 영혼 안에 거처하시면서 그대를 성화하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성령의 현존에 관한 진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대에게는 이 충고가 필요했습니다. 이제 그대는 그대 안에 계시는 그분의 사랑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대는 그분께 말씀을 건네고 그분의 친구가 되고 그분을 신뢰하고 싶어 합니다. 광을 내고 솎아내고 다시 불을 밝히는 그분의 일을 도와드리고 싶어 합니다.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대는 생각했지요.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나는 강조합니다. 그분께서는 그대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대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분은 온갖 것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는 원하십시오!

그분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거룩하신 손님이시며 스승이시며 빛이시며 인도자이시며 사랑이시여, 제가 당신을 참으로 제 안에 기쁘게 모셔 들이고 당신께서 제게 가르치시는 교훈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제가 당신을 위한 열성으로 불타오르게 하시고 당신을 따르고 사랑하게 하소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려면, 하느님께 곧장 날아가려면 기도와 보속이라는 튼튼하고 넉넉한 날개가 필요합니다.

구송기도를 바칠 때는 판에 박힌 듯이 반복하는 기도가 되지 않도록 막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연인에게 말하는 것과 같은 열정으로, 그리고 주님께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는 기회인 것처럼 기도해 보십시오.

그대가 만일 성모님의 자녀라는 데에 긍지를 지닌다면, 그대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하루에, 아침부터 밤까지 동정 마리아 대한 신심을 얼마나 자주 표현하는가?’

매주 토요일과 성모님 축일 전야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보상해야 하는 여러 이유 가운데서 특별히 두 가지 이유를 저 친구는 혼잣말로 말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주일과 성모님 축일에 (보통 마을 축제로 지내는데) 사람들은 기도하는 대신에 공공연한 범죄와 추문이 되는 죄악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상해 드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기만 하면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아마도 마귀의 영향을 받아서이기 때문이겠지만, 우리 가운데는 하느님의 착한 자녀가 되고 싶어 하면서도 주님과 성모님께 바치는 날들에 대해 마땅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이유가 여전히 아주 타당하다는 것을 그대는 깨달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배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예수님과 나누는 사랑에 찬 대화로서 비록 우리가 감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라도 절대로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저는 늘 이해해 왔습니다. 우리 삶 전체가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고, 우리는 언제나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토록 크시기에,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그만큼 커야 하며, 그래서 거룩한 미사가 거행될 때는 시간이 멈춰야 (할 정도로 집중해야) 합니다.

저 가지들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자라며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와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빵과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밀착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포도나무이십니다. 우리는 종일토록 그분께 애정 어린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연인들은 그렇게 합니다.

주님을 극진히 사랑하십시오. 그분을 더 잘 사랑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의식을 마음속에 지니고 키우십시오. 바로 지금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꽤 많은 이가 주님을 손안에 모시면서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나쁘게 대하고 소홀히 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미사 때뿐 아니라 온종일 주님을 극진히 모십시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실질적으로 만듭니다. 기도는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힘을 줍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대의 삶 전체가 기도일 수 있고 기도여야 합니다.

개인의 거룩함은 꿈이 아니라 신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구체적 실제입니다. 그것은 매일 사랑의 행위에서 끊임없이 드러납니다.)

그대는 동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고 그들을 이해해야 하며 그들의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저 카스티야의 신비가(십자가의 성 요한을 가리킴-옮긴이) 말처럼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어야 합니다.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서.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비록 우리의 활동을 좋게 평가하지 않고 심지어 불쾌하게 반응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들에게 좋은 형제, 자매가 아닙니다.

어머니인 교회에 대한 사랑과 봉사는 교회 구성원 개인들의 성덕 여하에 좌우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인의 완덕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배필이며 그대의 어머니인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순결하고 흠 없으며,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성화를 위한 노력은 다른 수많은 이들의 거룩함에만 아니라 하느님의 교회의 거룩함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 점을 분명히 확신하십시오. 그대가 참으로 원한다면 그대는 용기가 백배하여 하느님에 관한 교리가 지니는 더없이 사랑에 찬 진리를 어디에서나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대에게 귀 기울이시며 그대를 사랑하시고 그대에게 영광을 약속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전능하신 손으로 그대를 보호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밭은 비옥하며 주님께서 뿌리시는 씨앗은 질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가라지가 보일 때 가라지가 솟아나는 것은 사람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응답하지 않기 때문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잠에 떨어져 밭을 원수에게 무방비 상태로 방치한 것입니다.

불모의 땅이라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그대의 행위를 성찰하십시오.

나를 무척이나 슬프게 한 다음의 언급을 보면 그대 또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사악한 법들에 왜 저항하지 않는지 또 왜 저항해도 그렇게 효과가 없는지를 나는 아주 명확하게 봅니다. 위나 아래나 가운데나 그냥 부화뇌동하는 사람이 많아서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느님과 그분 교회의 원수들은 사탄의 끝없는 증오에 놀아나 무자비하게 활동하며 조직합니다.

‘모범적’이라 할 만큼 일관되게 그들은 간부들을 준비시키고 학교를 운영하며 지도자들을 임명하며 선동가들을 고용합니다. 드러나지 않게 그러나 대단히 효과적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사상을 퍼뜨리며 종교적 이념이라면 가리지 않고 파괴해 버리는 씨앗을 가정과 일터에 뿌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늘 진실하게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입니까?

게으름이나 부주의함, 결정을 늦추는 것 또는 중요한 문제들을 연구하는 일을 미적거리는 것을 평온함이라고 혼동하지 마십시오.

평온함은 부지런함과 언제나 함께합니다. 그것은 현안을 지체하지 않고 상정해 해결하는 데에 필요한 미덕입니다.

아들이여, 영혼들이 그대 안에서 찾는 그리스도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요? 그대의 교만에? 다른 사람들을 위압하려는 그대의 욕망에? 저 완고함에?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까? 아닙니다!

그대에게 고유한 개성이 있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 개성을 그리스도의 성품에 맞추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형제애와 봉사 정신을 살기 위한 좋은 행동 규칙을 그대에게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대가 없어도 다른 사람들이 그대의 일을 계속해나갈 수 있도록 그대의 경험을 그들에게 너그러이 전해 주고 그대가 꼭 필요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다른 이들의 성덕, 그들의 그리스도교적 행위, 그리고 그 행위의 효과에 대한 책임은 그대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그대의 열정과는 무관합니다.

그대는 그대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대가 멈춘다면, 그대는 너무나 많은 사람을 멈추게 하거나 그들에게 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