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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사랑의 담금질»에 수덕 투쟁 → 명랑하고 활동적인 태쟁 항이 있음.

망설이지 말고 그대의 삶을 차분하게 돌아보면서 용서를 청하십시오. 확고하고 단호한 결의로 그대가 힘들어하는 구체적인 이런저런 결점들을 개선해 나가도록 하십시오.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고질화한 저 악습들이 당연히 이행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으르지 마십시오. 결심하기 위해 새해가 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하루하루가 전부 좋은 결정을 내리기에 좋은 날입니다. 오늘, 지금!

저 가엾은 패배주의자들이나 새해가 될 때까지 기다리며 새롭게 시작하기를 미루지만, 그 후에도 그들은 결코 실제로 시작하지는 않습니다.

그대가 저지를 수 있는 한 가지 치명적인 질병, 용납할 수 없는 실수가 있습니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 하느님 자녀의 정신으로 싸우는 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영혼은 마비되어 홀로 참혹하게 살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겁쟁이는 벳자타 못가의 중풍 병자가 주님께 드린 그 말씀을 주님께서 하시도록 강요하는 것입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구나!”

그대가 예수님께서 기대하시는 그 사람이 아니라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금욕을 위한 분투는 부정적이거나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에 찬 긍정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스포츠입니다.

좋은 운동선수는 첫 경기에서 단 한 번 승리하려고 싸우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차분하게 그리고 자신 있게 훈련하면서 자신을 단련해야 합니다. 비록 첫 경기에서는 이기지 못할지라도 거듭거듭 계속 노력합니다. 그 장애물을 극복할 때까지 단호하게 노력을 계속합니다.

성성(聖性)의 길을 가면서, 우리는 때때로 그대가 진보하기보다는 퇴보하고 있다는, 더 좋아지기보다는 더 나빠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내적으로 분투하고 있는 한, 이러한 비관적인 생각은 착각으로, 그릇된 것으로 배척해야 할 속임수일 따름입니다.

항구하게 인내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끈덕지게 싸운다면 그대는 진보하고 있는 것이며 거룩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는 내게 말했습니다. “저는 정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은총의 기적 없이는 구원받을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오, 가련한 제 영혼! 저는 냉담한 채 머물러 있습니다. 더 나쁜 것은 거의 무관심한 채로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소송 사건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구경꾼 같습니다. 이런 나날은 완전히 부질없는 것으로 드러나겠지요?

그렇지만, 제 어머니는 저의 어머니이시고, 예수님은―감히 제가 이 말을 하다니요?―저의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저를 위해 기도하는 착하고 거룩한 영혼들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계속 걸으라고, 또 ‘감히’ 예수님께 말씀드리라고 나는 답변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대의 예수님이시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심으로 그대 영혼에 밝은 빛을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하루하루가 쇄신의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은총의 도움으로 종착지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확실히 하면서 말입니다. 그 종착지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대가 시작하고 다시 시작한다면, 그대는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에게 승리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그대가 분투한다면,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대는 정복할 것입니다. 그대가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란 없을 것입니다.

그대는 뉘우치면서 내게 말했습니다. “저 자신이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너무나 어리석고 욕심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한 일이라곤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 여기서 시작입니다. 시작이요. 언제나 방금 시작이지요. 그렇지만 날마다 마음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의 그런 노력을 축복해 주시기를!

신부님, 신부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지요. “저는 많은 오류를 범했습니다.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압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아시고 고려하시는 주 하느님께서는 다만 그대가 겸손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아 날마다 당신을 더욱 잘 섬기도록 분투하기를 바라실 따름입니다. 더욱 내적인 삶을 통해서, 끊임없는 기도와 신심 행위를 통해서 또 그대의 일을 성화하는 데 적합한 수단을 활용함으로써 말입니다.

성가실 만큼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말하지만, 영성 생활은 항구하게 시작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한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대가 잘못을 뉘우칠 때마다―물론 그대는 날마다 많이 뉘우쳐야 합니다만―그대는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하느님께 새로운 사랑을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삶은 항상 똑같은 행동의 반복이 아닙니다. 다음 행동은 이전 행동보다 더 올바르고 더 효과적이며 더 사랑으로 차 있어야 합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빛을 띠고 새로운 희망이 돼야 합니다. 그분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