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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사랑의 담금질»에 성소 → 성소에 대한 반응 항이 있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놀라거나 경악하지 마십시오. 거짓 신중함에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기 위한 부르심(성소)은 매우 갑작스럽습니다. 사도들에게도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분의 부르심을 따르는 일이.

사도들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따르는 일이 전부 하나였습니다.

그대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의 임금이시여, 저는 당신이 큰 소리로 선포하시는 말씀을 듣나이다. 그 말씀은 지금도 울려 퍼지고 있나이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다음에 그대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주님, 마음을 다하고 육신을 다하고 능력을 다해 제가 응답하나이다. ‘당신이 저를 부르셨으니 제가 여기에 있나이다.’”

그대의 이 응답이 날마다 현실이 되기를!

하느님께 선택받는 것은 거룩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또 그것을 요구합니다.

그대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그대의 삶-가련한 삶-은 인류 역사에 깊고 넓은 고랑을 남길 것입니다. 뚜렷하고 기름지며 영원하고 신적인 고랑을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대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한가운데서 가야 할 길을 분명히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이름 없는 사람이 되어 가장 먼 구석에서 아무도 모르게-오직 하느님과 그대만이 알게-일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종종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비록 끝에 가서는 그것이 편함을 찾는 길이라고 인정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선교사로 일한다는 생각과는 별개로, 단지 그렇게 남모르는 희생적 삶을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그대 마음에 떠오른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거룩하고 자연스러운 책무들을 수행하는 것은 그대의 소명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그런 책무들에서 벗어나 수도 단체에 “숨으려” 한다면 그대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평화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그대의 뜻을 행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대의 ‘성소’는 의무 불이행이라는 다른 이름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신성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전투를 마주하기를 순전히 인간적으로 꺼리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될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말씀하셨지요. “너는 나의 것”이라고.

지극히 아름다우시고 지극히 지혜로우시며 지극히 빛나시며 지극히 선하신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그대가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그대가 그분께 응답하지 못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