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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밭고랑»에 이해 → 남의 약점에 직면함 항이 있음.

‘복된 탓이여!’라고 교회는 부릅니다.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도움이 되었다면, 또 그대보다 못한 이웃을 더 잘 이해하고 돕기 위해 도움이 되었다면, 다시금 그대 귀에 속삭입니다. “다행이려나, 그대의 죄는.”

아마도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에는 일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을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혹은 그들과 어떤 특수한 순간에 접촉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여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대가 현실의 진실을 알고 실패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너무나 인간의 나약함, 그리고 그대 자신의 비참함을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더구나 소수 인간의 나약함을 이유로 예수님과 교회를 욕한다면 그런 태도는 공정하지 못하고 신의에도 어긋납니다.

그대는 말하기를 그 사람은 결점으로 가득차 있다고 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들은 천국에서만 발견된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신도 결점들이 있지마는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참아 주고 그리고, 그보다도 더해서, 그대에게 감사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굳건하게 가지셨던 사랑을 가지고 그대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들이 적지 않은 단점들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서 배우십시오.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그대는 불평합니다. 그저사람은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언제쯤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할 생각입니까?

그래요. 인정합시다. 확실히 그 사람의 행동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열하고 비난할 만한 태도를 취했고, 무릇 품위가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아무리 경멸을 받아도 당연하다, 라고 당신은 덧붙였습니다.

거듭 말하겠습니다, 그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찬성은 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의 보잘것 없는 생활도 성스러운 것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목숨을 속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주님이 경멸하지 않으셨던 생명을 당신이 경멸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대가 우정을 이유로 남의 비열한 행위에 공범자가 되어버렸다면 값어치도 없는 서글픈 동료가 된 셈입니다.

어느 정도의 사면을 부여할 수 있는가, 이는 권위자의 권한에 비례합니다. 단순한 판사라면 설령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해도 유죄 판결을 받고 죄를 인정한 범인에겐 형을 집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나라의 원수라면 때로는 사면이나 대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통회한 사람을 항상 용서하십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느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주님은 저의 어리석은 행동과 모욕적인 행위를 잊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맞이해 주셨습니다.” 이는 통회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20세기 돌아온 탕자가 형제들에게 쓴 말입니다.

“도움을 청할 힘조차 없는 일부 남녀를 저는 압니다”라고 그대는 저에게 슬픔과 실망으로 말해 줍니다. 그들을 궁지에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그대가 당신 자신과 그들을 구하려는 소망은 그들의 회심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거기다 또 만약에 그대가 그 일에 관해서 조심스럽게 생각한다면 그대는 누군가가 그대에게 도움을 주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