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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밭고랑»에 고통(슬픔) → 초자연적인 의미 항이 있음.

헌신은 희생과 기쁨, 사랑,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어지는 첫걸음입니다. 이렇게 다행스러운 광기로 일생을 채운다면,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부정, 괴로움, 슬픔밖에 보이지 않던 곳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인생 행로가 뻗어나가는 길이 이것입니다. 곧 고난 —그리스도 교적 용어로는— 십자가; 하느님의 뜻, 사랑; 행복은 여기에서부터, 이후에도 또 영원한 것입니다.

그대는 우리 주님께 청하기를 그대가 주님을 위해 약간 환난을 당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뒤, 지극히 인간적이고도 지극히 당연한 괴로움, 즉 가족과 관계되는 곤란이나 문제, 혹은 일상생활에 관련되는 무수한 문제가 오면, 그것들의 배후에 찾아오시는 그리스도가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못’을 솔직한 마음으로 당신의 손에 받아 들이십시오, 그러면 고통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만약에 그대가 환난을 당하더라도 불평하지 마십시오. 연마 되는 것은 존중되고 높이 평가된 돌입니다.

아픕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공당하는 데 맡기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을 손에 쥐고 다이아몬드처럼 다루어 주시고 계십니다. 평범한 돌이라면 그런 취급은 받지 못합니다.

겁에 질려서 고통에서 도망치는 자여, 기꺼이 고통 받는 자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묵상하십시오. 고통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감내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의 모범을 본받읍시다.

탄식하고 있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당신은 탄식해야 마땅하다는 듯이 설명합니다. 한 차례 핀으로 찌르고는 또 한 차례가 뒤 따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미꽃이 가시 사이에 피는 것을 알고 놀라는 편이 어리석다는 것쯤은 당신도 알 것입니다.

제가 언제나 해왔듯이 그대에게 계속 허물없이 말하게 해 주십시오. 나 자신의 환난들에 관해서 이야기할 마음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내 앞에 고상(苦像예수의 시신이 달린 십자가) 하나를 마련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비록 언제나 명랑하게 당했기는 하지만, 제가 퍽 많이 환난을 당해왔다는 것을 덧붙여도 저는 개의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에게 반대와 비방은, 군인들이 싸움터에서 받은 상처들과 매한가지입니다.

희생, 희생. 하긴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십자가니 포기니 하는 말을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희생이요, 기쁘고, 십자가는 성스러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하고 이렇게 스스로를 바칠 수 있는 사람은 기쁨과 평화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위로를 구하듯 희생이란 말만 집요하게 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당신의 생명-은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는데.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다운 삶,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어려움을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축복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치면 신경쇠약과 히스테리는 거의 사라질 텐데.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혁명은 아픔을 결실많은 고난으로 바꾸는 것과 악한 것을 무엇인가 선한 것으로 되어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악마로부터 이 무기를 빼앗아 버렸고, 그리고 그 무기로 우리들은 영원을 쟁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대가 그대의 생활에서 하느님께 바쳐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무가치하게 남아있는 모든 것에 관해서 생각할 때에는, 그대는 인색한같이 굴면서 그대가 포착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잡고서 모든 고난을 빠짐없이 이용하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우리들 불쌍한 존재들을 위해 언제나 거기에 있다만 그것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음 이외에 무엇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