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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밭고랑»에 수덕 투쟁 → 지속적이고 강력한 투쟁 항이 있음.

쉬는 날 없이 싸우겠다고 그대는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대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저에게 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적으로 봐도 문제가 모두 해결되고 장애물도 없는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그대가 많은 것들을 변화시켜야하기 때문입니다!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 충실하려면 투쟁이 요구됩니다. 진정한 투쟁, 사람과 사람, 즉 옛 인간과 새 하느님의 사람이된 새 인간 사이의 투쟁, 작은 일 하나하나에서, 항복하는 일 없이, 곁눈질하지 않고 계속해야 합니다.

거룩함(聖性). 거룩함에 도달하고 싶은 열의가 있다면 휴식도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에 대한 진정한 혐오감을 가슴 속에 키워야 합니다. 주님, 이제 결단코 당신을 모욕하는 일이 없기를 제가 다시는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되기를 바라옵니다!

그대의 초라한 육체와 인간적인 정욕의 부담을 느껴도 놀라지 마십시오. 지금에서야 “이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다니, 어리석고 천진한 아이가 아닙니까? 그대의 비열함은 장애물이 아니라 더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기 위한 자극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맑게 해주시는 것이니 말입니다.

떴다 가라앉았다 함. 당신은 올라가고 내려가는 기복이 너무 심합니다.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동안 그대는 편안한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내어주는 ‘바램’만 있는 상태와, 실제로 ’자신을 내어줌’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그대가 빈들거리고, 유혹에 직면하였을 때 내부로는 경박하고 외부로는 주저한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그대가 내적인 생활을 진전시키기는 불가능합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은혜에 저항하는 것을 ‘내일’이라든가 ‘나중에’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길의 또 다른 역설. 몇 가지만 조금 개선이 필요한 사람은 열심히 고치려고 노력하며 이룰 때까지 손을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것이 신체적 쇠약인지, 정신적 피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당신은 알 수 없습니다. 싸우고는 있지만, 진정한 싸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쁨과 사랑을 사람들에게 ‘옮기기’ 위해, 진심으로 좋아지려는 열의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명백한 말씀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에 구애됨 없이, 즉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서 싸우는 사람만이 승리의 관을 얻습니다.

더 나은 일을 하고, 더 결연한 태도를 취하고, 더 열의를 나타낼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당신은 자문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당신이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수많은 마음의 문 중에서 가장 방비가 약한 것이 사람의 어리석음, 즉 허영심이라는 것을 충분 이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근처를, 전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습니다. 감상적인 추억에 잠겨 있을 때나 히스테릭한 시각으로 의붓자식 취급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버릴 때, 자유가 없다고 함부로 생각해 버릴 때 등을 노리고 덮쳐 오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허세를 부리면서도 자신없다는 듯이 내게 말했습니다.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내리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도 있다고 말입니다.

당신의 무감각을 보고 슬퍼져서 저는 말했습니다. 올라가는 사람은 게으름뱅이를 끌고 가지만 보통은 내리는 사람이 더 강하게 끌어당기는 법이라고. 애처로운 사도를 스스로 찾고 있다는 걸 모릅니까? 이미 히포의 성스러운 주교(역주: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진하지 않는 자는 후퇴한다고.

당신에게는 잘 맞물리지 않는 두 부분, 즉 이성과 감정이 있습니다.

신앙의 지성은 길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영웅적으로 걸어가거나 어리석은 행보를 하거나 둘 사이의 큰 차이도 가르쳐줍니다.

특히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우리 손에 맡기신 사업의 신적인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그것과는 달리, 감정은 당신이 경멸하는 모든 것, 지금 경멸하는 것에조차 집착합니다. 무수한 작은 일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몸이 피곤해서인지 초자연적인 시각을 잃어서인지 당신의 의지가 약해졌다고 보자마자 그 작은 일들이 몰려와 당신의 상상을 끄집어내고, 끝내는 산이 되어 당신을 괴롭히고, 낙담하게 합니다. 일의 괴로움, 불순종, 수단의 부족, 꿈에서 보는 편안한 생활, 크고 작은 여러가지 꺼려야 할 유혹, 훌쩍거리는 감정의 욱신거림, 피로, 영적인 미지근함이 가져오는 괴로움 등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두려움, 즉 성인(聖人)이 되라고 하느님이 원하시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데서 오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엄한 말투지만 용서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에게는 되돌아갈 ‘동기’가 털어 버릴 만큼 있지만, 하느님이 주시는 은혜에 보답하는 대담함이 부족합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 ‘그리스도 자신’이 되도록 부르셨는데 말입니다. 당신은 사도 성 바오로에 대한 예수님의 훈계를 잊은듯 보입니다.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이것은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당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적 생활과 사도직으로 진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감정적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요구에 부응하겠다는 의지의 너그럽고 결연한 마음가짐입니다.

인간적인 일하는 방법과 초자연적인 일하는 방법과의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일하는 방식을 보면 시작은 좋지만 나중에 저조해집니다. 초자연적인 일하는 방식은 마찬가지로 시작은 좋은…그리고 나중에는 더 나은 일을 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언제나 자신의 변덕,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 도대체 어떠한 그리스도교적 완전성에 이른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대의 결점을 극복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당연한 일이지만 항상 나쁜 행동이라는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대의 의지는 견인불발(堅忍不拔)의 투쟁에서 단련되지 않았으니, 어려운 일이 닥쳤을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