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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고랑»에는 수덕 투쟁를 주제로 하는 24 항이 있음.

우리 모두가 다 부유해지고, 현명해지고, 유명해지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가다 —네, 우리 모두가 다— 성인(聖人)이 되도록 불리워져 있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하려면 투쟁이 요구됩니다. 진정한 투쟁, 사람과 사람, 즉 옛 인간과 새 하느님의 사람이된 새 인간 사이의 투쟁, 작은 일 하나하나에서, 항복하는 일 없이, 곁눈질하지 않고 계속해야 합니다.

시련이 너무 가혹한 것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본의 아니게’ 언덕길을 올라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충고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모든 것은 선을 위하여”라고 반복하십시오. “나에게 생겨나는 모든 일”은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일이지만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이것이야말로 무척 힘들게 여겨지지만, 조금도 틀리지 않는 정확한 결론입니다.

오늘날에는 남자도 여자도 착한 사람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착한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충분히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혁명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둘러싼 쾌락주의와 유물론, 이교적인 분위기에 대해 타협을 거부하는 사랑의 반역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거룩함(聖性). 거룩함에 도달하고 싶은 열의가 있다면 휴식도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이 헌신이나 올바른 행동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거나, 그것을 위해 싸울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였던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힘으로 쟁취하여 얻는, 순간순간 거룩한 싸움을 통해 회득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모든 이에게 해당한다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얼마나 개혁에 열성을 보입니까?

맡겨진 것들을 성실하게 이행하기 위해 우리들 자신을, 한 사람 한 사람 스스로 개혁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대는 유혹에 빠져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고 눈과 상상을 희롱하며 바보같은 수다를 떱니다. 그런 뒤 의심과 소심, 당혹, 슬픔, 낙담에 사로잡혀 놀랍니다.

일관된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처음의 열성이 있은 후에 동요와 망설임,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공부, 가족, 경제적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대가 그 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는, 아마도 그대는 쓸모가 없으리라는, 그대는 인생에 경험이 없다는 생각으로 걱정합니다.

제가 그대에게 그러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확실한 방법을 드리겠습니다.

악마의 유혹이거나 관용의 결핍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런 두려움을 극복할 확실한 방법을 알려주겠습니다. 그것은 ‘무시하기’, 그러한 생각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벌써 2천년도 전에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점을 알려주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죄에 대한 진정한 혐오감을 가슴 속에 키워야 합니다. 주님, 이제 결단코 당신을 모욕하는 일이 없기를 제가 다시는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되기를 바라옵니다!

그대의 초라한 육체와 인간적인 정욕의 부담을 느껴도 놀라지 마십시오. 지금에서야 “이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다니, 어리석고 천진한 아이가 아닙니까? 그대의 비열함은 장애물이 아니라 더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기 위한 자극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맑게 해주시는 것이니 말입니다.

만약에 당신 자신에 관한 생각들로 그대의 상상력이 넘쳐 흘러서 정상적으로는 그대의 도리에 어울리지 못할 환상적인 상황들과 환경들을 창출해 낸다면, 어리석게도 당신의 마음을 빗나가게 하고, 차갑게 해,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갈라놓을 것입니다. 이것이 허영입니다.

만약에 그대의 상상력이 남을 중심으로 돌아가면 그럴 사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남을 심판하는 결점에 빠져들 것입니다. 또한 남의 행동에 대해 객관적이지도 않고 비열한 해석을 내리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경솔한 판단입니다.

만약에 그대의 상상력이 당신 자신의 재능이나 말투, 혹은 다른 이가 그대에게 감탄하게 만드는 일에 집중된다면 강직한 의도를 잃고 자만심을 조장할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상상을 풀어헤치면 시간 낭비가 되고 상상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연이은 유혹에게 문을 열어 놓는 셈입니다.

단 하루도 내적 금욕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소명에 꿋꿋하게 대응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유혹들을 이겨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단순한 바보가 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살고 싶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심장이 멈춰줬으면 하는 바람과 같지 않습니까?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은혜에 저항하는 것을 ‘내일’이라든가 ‘나중에’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길의 또 다른 역설. 몇 가지만 조금 개선이 필요한 사람은 열심히 고치려고 노력하며 이룰 때까지 손을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대는 행동의 근원을 밝혀내지 않기 때문에, 때때로 ‘문제’를 만들어 내고 맙니다.

단 하나 당신에게 필요한 것, 그것은 단연코 전투의 대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즉, 충실히의무를 다하고 영적지도에서 주어진 지시를성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성인(聖人)이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과거보다 더 강하고 절박하게 느꼈습니다. 안락함을 좋아하는 어떠한 징조라면 무엇이든 용감하게 버려야 한다고 확신하고 서슴없이 매일의 투쟁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뒤늦게 기도 중에 주님께 말씀드리는 동안, 그대는 투쟁이 사랑의 동의어임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앞으로 다가올 전투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요구하였습니다.

헷갈려요? …솔직히 성실해집시다. 그리고 하느님 혹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보다 이기주의의 노예가 되고 싶다고 말합시다. 그렇다고 인정합시다.

유혹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은 복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시험을 받은 후에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이 내적인 운동이 끝없는 평안의 근원임을 인식하면 마음이 기쁨으로 채워지지 않겠습니까.

“지금, 시작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외침입니다. 매순간 충성을 다할 때나 관용이 결여되어 왔거나 간에, 하느님을 온전한 충성으로 섬길 - 사랑하려는! - 소망을 새롭게 하는 사람의 외침입니다.

그대가 찾고있는 것은, 개심(改心)이 아니라, 자신의 결점을 소중히 간직해 두는 상자입니다. 그리하여 비록 씁쓸한 뒷맛이 남기는 하나 그 슬픈 짐을 질질 끌면서도 안락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당신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것이 신체적 쇠약인지, 정신적 피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당신은 알 수 없습니다. 싸우고는 있지만, 진정한 싸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쁨과 사랑을 사람들에게 ‘옮기기’ 위해, 진심으로 좋아지려는 열의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명백한 말씀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에 구애됨 없이, 즉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서 싸우는 사람만이 승리의 관을 얻습니다.

더 나은 일을 하고, 더 결연한 태도를 취하고, 더 열의를 나타낼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 당신은 자문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당신이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수많은 마음의 문 중에서 가장 방비가 약한 것이 사람의 어리석음, 즉 허영심이라는 것을 충분 이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근처를, 전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습니다. 감상적인 추억에 잠겨 있을 때나 히스테릭한 시각으로 의붓자식 취급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버릴 때, 자유가 없다고 함부로 생각해 버릴 때 등을 노리고 덮쳐 오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허세를 부리면서도 자신없다는 듯이 내게 말했습니다.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내리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도 있다고 말입니다.

당신의 무감각을 보고 슬퍼져서 저는 말했습니다. 올라가는 사람은 게으름뱅이를 끌고 가지만 보통은 내리는 사람이 더 강하게 끌어당기는 법이라고. 애처로운 사도를 스스로 찾고 있다는 걸 모릅니까? 이미 히포의 성스러운 주교(역주: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진하지 않는 자는 후퇴한다고.

당신에게는 잘 맞물리지 않는 두 부분, 즉 이성과 감정이 있습니다.

신앙의 지성은 길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영웅적으로 걸어가거나 어리석은 행보를 하거나 둘 사이의 큰 차이도 가르쳐줍니다.

특히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우리 손에 맡기신 사업의 신적인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그것과는 달리, 감정은 당신이 경멸하는 모든 것, 지금 경멸하는 것에조차 집착합니다. 무수한 작은 일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몸이 피곤해서인지 초자연적인 시각을 잃어서인지 당신의 의지가 약해졌다고 보자마자 그 작은 일들이 몰려와 당신의 상상을 끄집어내고, 끝내는 산이 되어 당신을 괴롭히고, 낙담하게 합니다. 일의 괴로움, 불순종, 수단의 부족, 꿈에서 보는 편안한 생활, 크고 작은 여러가지 꺼려야 할 유혹, 훌쩍거리는 감정의 욱신거림, 피로, 영적인 미지근함이 가져오는 괴로움 등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두려움, 즉 성인(聖人)이 되라고 하느님이 원하시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데서 오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엄한 말투지만 용서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에게는 되돌아갈 ‘동기’가 털어 버릴 만큼 있지만, 하느님이 주시는 은혜에 보답하는 대담함이 부족합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 ‘그리스도 자신’이 되도록 부르셨는데 말입니다. 당신은 사도 성 바오로에 대한 예수님의 훈계를 잊은듯 보입니다.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이것은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당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