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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밭고랑»에 성소 → 성소에 대한 반응 항이 있음.

주님의 부르심 —소명— 은 언제나 이렇게 제시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그렇습니다. 소명은 자기 부정 즉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자기 봉헌이 완전하다면 그 희생이 —기쁨과 평화― 로 바뀌어지는 것이 그 얼마나 유쾌합니까.

충분히 단단한 결심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애인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펜을 들어보니 망설이는 마음에 지고 말았습니다.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졌습니다. 인간이므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 기분을 안다, 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주님의 요구에 부응하여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므로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고 알고 있지만, 이 세상에서의 사랑은 버려야할 목록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듯이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대는 열광이나 열정에 이끌려 그런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한 후에 결심했습니다. 바라기는 했지만 감정적인 것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원하신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대는 아무런 심각한 의문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대는 가끔은 넘쳐 흐르기도 하는,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기쁨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그 담대한 사랑의 행동에 보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와서 나를 따르라.” 이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 열두 제자를 위한 부르심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호소가 있을 수 있습니까.

첫 번째 제자들은 부족한 지식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일 ‘사도직’을 계속하지 않기 위한 수많은 핑계를 찾고 있는 당신에게 손에 맞는 장갑처럼 해당합니다.

결코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일을 하시는 것은 지금도 하느님이시라는 것. 다만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자기를 그리스도와 맞대면하는 자리에 놓았다고 그가 그대를 나무랐다 해서, 또는 그가 격분해서 “이제 저는 결심을 하지 않는 한 마음 편히 살 수 없다”고 말을 더 보탠다 해서 놀라지 말고 겁먹지 마십시오.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를 진정시켜 보려고 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아마 옛날의 불안, 즉 양심의 소리가 전면에 떠올랐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결심한 후 당신은 매일 새로운 발견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이 일은 어떻게 되어야만 하는가?” 라고 끊임없이 자문했고, 게다가 그 후로도 의심과 실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나 조리 있고 분명하며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앳된 당신의 물음에 대해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를 보면서 당신은 문득 생각하게 됩니다.“예수께서는 틀림없이 이렇게 첫 열두 제자들을 돌봐 주셨을 것이다.”

정직하십시오. 만약에 그대가 “그들을 잡으려고” 시도해 왔다고 그대에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이 그대가 하려고 원하는 바임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나 그들을 위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들이 소명을 얻지 않았다면 —만약에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오지 않을 것이고, 또 만약에 그들이 소명을 얻었다면, 복음서에 나오는 돈 많은 젊은 사람같이 끝내고 만다는 것은 그들에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혼자서 슬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