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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초자연적인 생활 → 사도직 항이 있음.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는 하느님 자비의 보호 아래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 자녀답게 행동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확실히 뿌리내리게 하는 주요한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저는 그 가운데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는 ‘내적 생활’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 깊이 알게 해주는 ‘교리교육’입니다.

먼저 ‘내적 생활’에 관해 말씀드리면, 사실 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정말로 드뭅니다. ‘내적 생활’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마도 어두운 성전 같은 것을 상상할 것입니다. 저는 25년 넘게 ‘내적 생활’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줄곧 이야기해왔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생활’입니다. 왁자지껄한 도시에서, 대낮의 햇빛 속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 가족과 함께 있거나 잠깐의 휴식을 취하며 살아가는 보통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생활’ 말입니다. 그들은 온종일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내적 생활’이란 지속적인 기도 생활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기도의 필요성을 진정 찾지 못했나요? 여러분을 거룩하게 이끄시는 하느님과의 친교로 나아가고픈 절실함이 없는 건가요? 바로 그것이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해했던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이와 관련해 교부(敎父)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인간이 사랑함으로써 인간이 하느님이 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위해 실제로 염려하시는 그분께 감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비록 감정의 문제는 아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마치 영혼에 새겨진 자국처럼 조금씩 조금씩 우리에게 느껴집니다. 사랑을 다해 우리를 쫓아오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묵시 3,20).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때때로 낮 동안에 그리스도와 더 길게 이야기하고픈 충동을 느끼지 않나요? ‘제가 나중에 모든 것을 털어놓을게요.’라고 하면서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그분과 나누고 싶지 않나요?

우리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특별히 예비된 이 기도 시간에 가슴은 넓어지고, 의지는 굳세어지며, 주님 은총에 힘입어 우리 마음속 인간의 현실세계를 초자연적인 내용으로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 결과 여러분의 행동을 개선하고 모든 사람들과 더욱 사랑 넘치는 관계를 맺으며, 사랑과 평화를 향한 그리스도교의 투쟁을 위해 마치 훌륭한 운동선수인 것처럼 마지막 힘까지 남김없이 쏟아내겠다는 명확하고도 실제적인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우리네 심장의 고동처럼, 우리의 맥박처럼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관상생활(觀想生活)’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관상생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과업은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으려는 건물이 주님의 집이 아니라면 집 짓는 사람들의 수고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을 향한 이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결정적인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도직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흘러넘쳐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이 바로 사도직입니다. 내적 생활은 생명의 빵과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직은 그런 내적 생활의 명확하고도 필연적인 외적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맛보면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내적 생활과 사도직을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인 그리스도를 구원자이신 그분의 역할과 분리할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인류를 당신과 하나 되게 하기 위해 말씀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니케아 신경에서 고백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도직은 일종의 본능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활동이나 직업생활에 더하여 외부로부터 추가된 어떤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푸스데이’를 설립하신 그날 이후 저는 이 얘기를 계속해왔습니다. 우리는 우리네 일상의 일들을 성화(聖化)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들 개개인에게 적합한 특별한 직업을 꾸려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도직은 호흡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도직과 같은 초자연적인 삶의 활력이 없으면 하느님의 자녀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은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우리의 염려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계명에 대한 응답이란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우리를 당신의 증거자로 온 세상에 파견하셨습니다. 우리의 책무는 막중합니다.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활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 넘치는 인성을 떠올리도록 분투해야 함을 의미하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만났을 때 이렇게 얘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로군! 미워하지 않고 기꺼이 이해하려고 하며, 광신하지 않고 기꺼이 희생하려 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임을 스스로 내보이며,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니,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로군!” 이렇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