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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초자연적인 생활 → 내적 생활 항이 있음.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는 하느님 자비의 보호 아래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 자녀답게 행동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확실히 뿌리내리게 하는 주요한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저는 그 가운데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는 ‘내적 생활’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 깊이 알게 해주는 ‘교리교육’입니다.

먼저 ‘내적 생활’에 관해 말씀드리면, 사실 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정말로 드뭅니다. ‘내적 생활’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마도 어두운 성전 같은 것을 상상할 것입니다. 저는 25년 넘게 ‘내적 생활’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줄곧 이야기해왔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생활’입니다. 왁자지껄한 도시에서, 대낮의 햇빛 속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 가족과 함께 있거나 잠깐의 휴식을 취하며 살아가는 보통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생활’ 말입니다. 그들은 온종일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내적 생활’이란 지속적인 기도 생활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기도의 필요성을 진정 찾지 못했나요? 여러분을 거룩하게 이끄시는 하느님과의 친교로 나아가고픈 절실함이 없는 건가요? 바로 그것이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해했던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이와 관련해 교부(敎父)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인간이 사랑함으로써 인간이 하느님이 된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위해 실제로 염려하시는 그분께 감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비록 감정의 문제는 아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마치 영혼에 새겨진 자국처럼 조금씩 조금씩 우리에게 느껴집니다. 사랑을 다해 우리를 쫓아오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묵시 3,20). 여러분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때때로 낮 동안에 그리스도와 더 길게 이야기하고픈 충동을 느끼지 않나요? ‘제가 나중에 모든 것을 털어놓을게요.’라고 하면서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그분과 나누고 싶지 않나요?

우리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특별히 예비된 이 기도 시간에 가슴은 넓어지고, 의지는 굳세어지며, 주님 은총에 힘입어 우리 마음속 인간의 현실세계를 초자연적인 내용으로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 결과 여러분의 행동을 개선하고 모든 사람들과 더욱 사랑 넘치는 관계를 맺으며, 사랑과 평화를 향한 그리스도교의 투쟁을 위해 마치 훌륭한 운동선수인 것처럼 마지막 힘까지 남김없이 쏟아내겠다는 명확하고도 실제적인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우리네 심장의 고동처럼, 우리의 맥박처럼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관상생활(觀想生活)’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관상생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과업은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으려는 건물이 주님의 집이 아니라면 집 짓는 사람들의 수고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체의 풍성함 

우리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 동안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을 때는 이미 밤이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에 따르면, 성체제정 시간이 밤이었다는 것은 “그때까지의 시간이 모두 끝났음”을 뜻합니다. 세상은 이미 어둠에 빠져든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옛 예식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드러내는 옛 징표들이 이미 실현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새벽, 새로운 파스카의 길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밤에 성체성사가 제정됐습니다. 곧 다가올 부활의 새벽을 준비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도 이 새로운 새벽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해롭거나 이미 낡았거나 쓸모없는 모든 것들, 예컨대 낙담과 의혹, 슬픔, 비겁함 같은 것들을 모두 내팽개쳐야 합니다. 성체는 하느님 자녀들에게 ‘거룩한 새로움’을 주십니다. 우리는 “정신을 새롭게 하여” (로마 12,2) 우리의 모든 감정과 행동을 새로이 변화시킴으로써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활력의 원칙’을 선사받았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온 강하고 새로운 힘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낡은 누룩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는 영원히 남아 있을 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나인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물론 다른 예들도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장면들로 넘쳐나니까요. 각각의 사건들마다 벗이 아파할 때 함께 고통받는 한 인간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된 교회는 상처 입으신 성심으로부터 태어났다네.” 활짝 열린 이 예수 성심으로부터 생명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비록 잠시 지나치는 생각일지라도 여기서 우리는 성사(聖事)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사들을 통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힘을 우리가 더불어 나누도록 해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체성사를 떠올릴 때마다 어떻게 특별히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성체성사는 갈바리아산의 거룩한 희생이며, 동시에 그 거룩한 희생이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 피 흘리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었고, 그 힘이 우리 영혼을 가득 채우며, 우리의 모든 활동과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방식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스도의 성심은 곧 그리스도인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를 내어놓을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러한 ‘자기 증여’의 원천은 단순히 우리들 자신의 열망이나 노력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망과 노력은 수시로 흔들리고 허약하니까요. 자신을 내어주는 삶은 우리에게 주신 은총으로부터 힘을 얻습니다. 그 은총은 인간을 만드신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마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내적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결코 낙담하거나 의기소침해선 안 됩니다. 저는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일상 삶에서, 가장 소박한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지 생각해달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해 살아가는 인간 행동의 본질이 바로 그 물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학적 미덕들을 실천해가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은 기쁨과 힘과 평화를 찾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의 결실입니다. 그분의 성심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해봅시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거룩한 신비입니다. 성부와 성령을 향한 성자의 사랑 또한 불가해합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를 이어주는 사랑의 끈이신 성령께서는 말씀 안에서 인간의 마음과 만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이런 핵심적 요소들을 얘기할 때면, 우리들 사고(思考)의 한계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계시(啓示)의 위대함을 함께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을 한참 넘어서는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겸허하고 확고하게 이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증거들을 통해 진리임을 압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마음 깊이 계신 사랑이 인간에게 내리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 성심 안에 계신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기도의 학교 

주님께서는 동정 성모님의 은총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여러 가지 다른 측면들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순결, 겸손, 굳셈, 관대함, 그리고 성실함 등… 성모님의 삶에서 나타나는 여러 면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성모님을 닮고 싶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여러분께 이러한 성모님의 모든 특성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특징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적 성장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모님께서 사셨던 ‘기도하는 삶’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어머니께서 주시는 은총을 잘 이용한다면, 그리고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성령의 감화를 언제라도 따라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마주 대하는 일에 진심으로 전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익명의 군중 속으로 도망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내적 생활이 하느님과의 개인적 만남과 무관하다면 그런 내적 생활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교와 가장 맞지 않는 것이 바로 ‘피상성(皮相性)’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마냥 단조롭게만 살아간다면 이는 관상적인 영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각자 그분께 응답해야 합니다.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1사무 3,5) 이렇게 말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물을 수 있죠.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 거죠?” 하느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일, 그리고 여러분의 하루를 채우는 모든 일들… 그것 말고 무슨 할 얘기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탄생, 그분이 우리와 함께 보내신 시간, 그분의 알려지지 않은 삶,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 그리고 수난과 죽음, 부활… 이런 내용들에 관해 얘기하는 겁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앞에서 성모님을 우리의 중재자로 부르고, 우리의 아버지이자 주님의 아버지인 요셉 성인께 우리의 대변자가 되어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해나가는 일상의 일과, 우리의 가족과 친구 관계, 그리고 우리의 큰 계획과 작은 단점 등에 관해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제 기도의 주제는 곧 제 삶의 주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하느님과 이야기 나누는 방법입니다. 제가 처한 상황을 깊이 생각해보면 특별하고도 굳센 결심이 떠오릅니다. 변화하고 개선하며, 하느님 사랑 앞에 더욱 온순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이것은 진지하고 구체적인 다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께 대한 간청을 잊어선 안 됩니다. 우리의 확신만큼이나 절박하게 “우리를 결코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피신처 하느님” (시편 43,2) 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매우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매일 살아가는 생활환경 안에서 일어납니다. 모든 일이 우리네 삶의 일상적인 리듬을 따라갑니다. 하루하루가 똑같고 심지어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겉으로는 너무도 평범하게 보이는 우리의 상황들이 거룩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함께하시기를 원하시며, 심지어 우리의 가장 무의미한 활동들조차도 그 내부로부터 생명력을 주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명확하고 객관적이며 초자연적인 사실(실재-實在)입니다. 이는 역사의 기록에 이름을 남길 수 없는 우리들을 위로하려는 경건해 보이는 듯한 배려가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사무실에서, 공장에서, 가게에서, 교실에서, 들판에서 하는 모든 일들, 어떤 종류의 육체노동이건 지적 직업이건 간에, 그 일이 단 한 번이건 수천 번 반복되는 일이건 간에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나쁜 기질이나 성향을 스스로 다스리기 위한 우리의 숨겨진 희생에도 똑같이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여러분의 기도 안에서 이런 생각들을 되새겨보십시오. 예수님께 ‘당신을 경배합니다’라고 말씀드리기 위해 이러한 생각들을 활용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세상의 한가운데에서도, 거리의 소음 속에서도,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관상가(觀想家)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는 학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첫 번째 공부입니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최고의 스승이십니다. 왜냐하면 동정 마리아께서는 당신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관계없이 항상 그런 신앙의 자세, 초자연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태도를 견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51)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우리를 관상가(觀想家)로 만들어 달라고 청합시다. 우리를 가르치셔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하느님의 끊임없는 부르심을 깨닫게 해달라고 부탁드립시다. 지금 그분께 간구합시다. ‘우리의 어머니, 당신은 예수님을 낳으셨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북돋우셔서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그 은총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우리 영혼을 다스리시는 주님 

우리 주님, 우리 하느님은 얼마나 위대하신지요! 우리 삶에 초자연적인 의미와 거룩한 생명력을 주시는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당신 아드님의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존재, 영육 간의 모든 것을 걸고 우리가 이렇게 말하도록 하십니다. “그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참으로 나약한 우리들이지만, 우리는 “그분께서 다스리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당신께서는 우리가 진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피조물들입니다. 우리는 발에 묻은 진흙에 지나지 않지만, 마음과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선,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다스리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내가 네 안에서 다스리기 위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하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저는 당신의 은총이 절실하다고 답하겠습니다. 오직 당신의 은총이 있어야만 제 모든 심장 박동과 호흡, 그리고 최소한의 진지한 시선과 가장 평범한 제 언어들과 기본적인 제 감정이 저의 임금이신 그리스도께 드리는 찬미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임금으로 모시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들 자신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우리 마음을 드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공허한 노릇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에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요소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존재하지도 않는 신앙을 겉치레로만 보여주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잘못 쓰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저나 여러분이 완벽해야만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을 다스리신다면, 우리는 정말로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딸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오신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요한 12,15)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시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비천한 동물을 왕좌(王座)로 쓰십니다.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의 눈에 제가 한 마리의 당나귀로, 짐승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저는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 앞에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늘 당신과 함께 있어 당신께서 제 오른손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시편 73,22-23) 예수님 당신께서 제 고삐를 쥐셨습니다.

당나귀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그 짐승의 모습을 한 번 떠올려보십시오. 난데없이 발길질을 해대는 늙고 고집스럽고 고약한 당나귀 말고, 귀가 안테나처럼 쫑긋한 어린 당나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녀석은 많이 먹지 않고 힘들게 일하며 잽싸고 경쾌하게 걷습니다. 더 말쑥하고 날래고 힘센 동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군중의 환호에 답하시며 임금으로서 백성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분이 택하신 동물은 당나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활한 사람들과 냉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겉으로는 매력적이지만 공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십니다. 그분이 좋아하시는 것은 젊은 마음, 소박한 발걸음,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지니는 활달함, 그리고 당신의 애정 어린 충고에 주목하는 맑은 눈동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다스리시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