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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초자연적인 생활 →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 항이 있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이 은총의 상태에서 거룩해진다고 가르쳐줍니다. 인간이 하느님으로 가득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남자이고 여자이지, 천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과 피로 된 인간이고, 감정과 열정, 슬픔과 기쁨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런 인간이 이렇게 거룩해졌다는 것은 모든 인간적인 것들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은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미리 맛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1코린 15,20-22)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분이 마지막 만찬에서 당신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필립 2,5)

그렇게 살면 바오로 성인처럼 외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 2,20)

성령 알아차리기 

성령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서 소유하셔서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더욱더 당신과 닮게 만들어주시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성숙하고 심오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멋대로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자라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 2,42)

이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방식이며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네 신앙의 가르침이 우리의 일부분이 될 때까지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체 안에서 우리 주님을 받아 모시고, 기도 안에서 주님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비인간적인 행동을 감추려 들지 말고 주님과 마주 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의 방식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마도 몇 가지의 장점은 갖게 될 것입니다. 해박하게 사고하는 능력, 어느 정도 치열한 활동, 일정 수준의 실천과 헌신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영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로 일치하지 않고, 그분의 구원사업에 동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류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단순화된 버전만을 실천하는 의무를 가진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비록 각자 받은 영적 은사와 서로가 처한 인간적 상황들이 엄청나게 다양하지만, 오직 하나의 믿음, 하나의 희망, 하나의 사랑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선물을 나눠주시는 분은 한 분이신 성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던졌던 질문을 우리들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코린 3,16) 우리는 이 말씀을, 더욱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을 대하도록 우리가 초대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어떤 사람들에겐 성령은 아주 낯선 분이고 어마어마한 미지의 존재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단순히 이름뿐인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안에 계신 세 위격 중 한 분이시며, 우리가 함께 얘기할 수 있고 그분의 삶을 우리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교회 전례 안에서 우리가 배운 대로 우리는 단순하게 그리고 신뢰하며 성령을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주님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됐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엄청난 특권을 더욱 확실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제가 앞에서 언급했던 ‘거룩하게 됨’의 위대함과 진리를 모두 알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게 됨’이란 하느님 당신의 생명 안에서 더불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룩한 실체들을 그려 넣는 예술가가 아닙니다. 자신에게도 생소한 듯한 그림을 그리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닮아가도록 이끄시는 성령의 방식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느님인 동시에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에 마치 밀납 위에 직인을 찍듯이 그분 자신의 인호를 박으십니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성령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범에 따라 우리의 본성을 회복하게 해주시고, 동시에 하느님과 닮은 모습을 인간에게 되돌려주시는 것입니다.”

말씀과 빵 안에 현존하시는 분… 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님께서는 제대의 성체 안에 숨어 계십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어 당신께 다가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양식이 되어주심으로써 당신과 우리가 하나가 되길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한 1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무능함을 탓하거나 어렵고 힘든 경로로 당신을 찾아오라고 강요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분께서는 바로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머물러 오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히 우리와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성제를 드리기 위해 제대 주위에서 서로 만날 때, 우리가 성광(聖光) 안에 계신 성체를 묵상하거나 감실에 계신 주님을 경배할 때, 우리의 신앙은 굳세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이 새 생명에 관해 깊이 생각해야 하며, 하느님의 사랑과 온유함에 감화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 2,42) 성경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신앙에 끌려 한데 모였고, 성체를 더불어 나누며 한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 완벽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신앙과 빵과 말씀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성체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확실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현존(現存)하신다는 서약입니다. 이는 또한 온 세상을 떠받쳐주시는 당신 권능의 언약이며, 구원을 확약하는 맹세인 것입니다. 이 구원의 약속은 세상 끝날에 인류 가족이 천국의 집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천국의 집에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한 분이며 유일하신 하느님인 복된 삼위일체를 만나게 됩니다. 빵과 포도주라는 겉모양 안에 실재(實在)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의 신앙은 약동할 것입니다.

말씀과 빵, 즉 기도와 성체 안에서 예수님과 끊임없는 친교를 맺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많은 신자들이 세대를 거쳐 성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온 여러 방법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식적인 성체현양 행사를 통해 신앙을 선포하는 방법, 교회의 평화 안에서 또는 각자 마음의 친밀함 속에서 조용하고 소박한 실천을 이어가는 방법 등 모든 종류의 성체현양 방법을 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미사를 사랑하고, 우리 생활의 중심에 미사가 들어서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에 충실하게 참석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주님의 현존 안에 우리가 항상 함께하기를 원하면서 그날의 남은 시간 동안 그분에 관해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이 일하셨던 대로 일하고, 그분이 사랑하셨던 대로 사랑할 준비를 하며 각오를 다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대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순간에만 현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당신의 친절하심에 감사드리는 법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감실에 보관된 성체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로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제게 있어서 감실은 언제나 ‘베타니아’였습니다. 베타니아는 그리스도께서 머무르셨던 조용하고 쾌적한 지역입니다. 베타니아에 살던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가 그랬던 것처럼 단순하고도 자연스럽게 우리의 걱정과 아픔, 소망과 기쁨을 그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어떤 마을이나 시골에서 우연히 교회와 마주칠 때 매우 기쁩니다. 그곳은 또 하나의 감실이자, 제 영혼이 자유로워져 성사(聖事) 안에서 스스로 주님과 하나 되는 또 다른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조용한 희생의 신비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당신 어머니를 찬미하신 것이 진실이라면, 성모님의 고통, 그리고 노동이나 믿음의 시험으로 인한 그분의 괴로움을 경감해 주시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똑같이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마을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7-28) 이는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소서” (루카 1,38)라고 하며 순명하신 어머니께 대한 찬사였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신 당신 말씀을 진정으로 아낌없이 살아내셨으며, 그에 따른 모든 결과들이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화려하게 사시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루하루를 숨어서 말없이 희생하며 지내셨습니다.

이러한 진실들을 묵상해보면, 우리는 하느님의 논리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네 삶의 초자연적인 가치는 어마어마한 과업을 성취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과업이 엄청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의 지나친 상상 때문입니다. 오히려 매일매일의 일상적이고 사소한 희생의 기회들을 아낌없이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삶의 초자연적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품어 안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서, 거룩하게 되기 위해 우리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처지들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겉으로는 가치 없어 보이는 것들을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그런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렇게 시작해야 하는 것이지요. 성모 마리아께서 바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성모님은 은총으로 가득하셨고,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분이며, 모든 천사와 성인들보다 높은 곳에서 찬미 받으시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창조되신 분입니다. 고통과 슬픔,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는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하느님의 계획을 들으시기 전까지는 당신이 태초부터 구세주의 어머니로 선택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셨습니다. 성모님은 당신 자신을 미천한 피조물로 여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참으로 겸손하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 (루카 1,49)라고 인정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순결하심과 겸손하심, 그리고 관대하심은 우리들의 가증스럽고 이기적인 모습과 확연히 대비됩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 만큼 성모님을 닮겠다는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모님의 충실하심을 본받기 위해 분투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우리 안에서 큰일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미소함은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미소한 것들을 선택하심으로써 당신 사랑의 권능이 더욱 드러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