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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께서 지나가신다»에 초자연적인 생활 → 기도 생활 항이 있음.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믿게 해주고 그분과 끊임없이 대화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쉼 없이 기도하는 삶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밤부터 아침까지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외로운 사람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항상 만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계시며 동시에 천국에 계시는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Sine intermissione orate.)” (1데살 5,17) 라고 일러줍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다음과 같이 이 말씀을 설명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구세주이자 임금으로 알고 있는 그분,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을 찬미하고 경배하라고 얘기합니다. 그분을 통해서 그분의 아버지를 찬미하고 경배하되, 몇몇 사람들처럼 특별한 날에만 그러지 말고, 언제나 우리의 온 삶을 통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찬미하고 경배하라고 얘기합니다.”

스스로의 이기심을 이겨내야 할 때, 다른 사람들과의 기쁜 친교를 즐길 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일상 안에서 다시금 하느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교에 다가갑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왕국을 찾는 데에 자신의 온 삶을 바칩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비록 이 세상의 것이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시작하고 또한 준비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말씀과 생명의 빵에서, 성체와 기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우리의 친구이자 진실로 살아 계신 분으로 모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독서인 히브리서 말씀에서 읽은 그대로,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 7,24-25)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동료이자 친구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어렴풋하게만 볼 수 있는 동료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참으로 우리 곁에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의 온 영혼을 가득 채워 그분과 영원히 함께하기를 열망하게 합니다.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하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도 ‘오십시오.’하고 말하여라. 목마른 사람은 오너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 이 일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묵시 22,17, 20)

기도하는 삶 

“내 생명의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네.”(시편 42,9) 만약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살아계시는 존재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기도와 한데 엮여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나 기도란 한 번 드린 뒤에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이를 밤낮으로 되새기는” 의로운 사람이 돼야 합니다. “밤새도록 당신을 묵상하며 제 기도가 저녁에 드리는 분향과 같기를 바랍니다.” 밤부터 아침까지, 또 아침부터 밤까지 우리의 하루 전체가 기도를 위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잠조차도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일깨워줍니다.

예수님에 관해 복음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때때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와 친밀한 대화를 하시면서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사랑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스승님이 항상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나서 그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바오로 성인은 “기도에 전념” (로마 12,12) 하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하면서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본보기를 널리 전파했습니다. 루카 성인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마치 예술가가 붓으로 그린 듯한 문구로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사도 1,14)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훈련장에서 은총의 도움으로 활력을 얻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양식인 기도는 한 가지 형식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기도의 통상적인 표현을 말씀에서, 또는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셨거나 주님의 천사들과 성모님이 가르쳐주신 염경기도(念經祈禱)에서 찾아낼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에 우리는 수많은 신앙의 형제들이 신심을 표현했던 유구한 언어들을 사용하기도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전례에 사용하는 기도문(lex orandi)이나, 또는 ‘천주의 성모여, 기억하소서’, ‘하례드리나이다, 여왕이시여’(Sub tuum praesidium, Memorare, Salve, Regina)’ 등 성모님께 드리는 교창(交唱)처럼 열절한 사랑을 표현한 기도들도 있습니다.

또 다른 경우,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두세 단어로 함축해 화살처럼 빨리 드리는 기도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배우게 된 화살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 8,2)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요한 21,17)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마르 9,23) 이 기도는 제 신앙을 강하게 해줍니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마태 8,8)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28)… 이 밖에도 사랑으로 가득한 짧은 문구들이 있습니다. 이 기도문들은 우리 영혼의 심오한 열정으로부터 솟아나 매일매일의 다른 여러 환경들에도 합치하는 것들입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의 기도 생활은 오직 하느님과의 대화를 위해 바쳐진 순간들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2천 년 동안 우리를 기다려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기 위해 가능하면 감실 앞에서 홀로 드리는 고요한 대화의 순간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가슴으로 나누는 대화를 ‘묵상기도(默想祈禱)’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혼 전체가 그 기도에 참여합니다. 우리의 지성과 상상력과, 기억과 의지가 모두 기도 안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매일 다반사로 반복되는 일상에도 불구하고 이 기도는 우리네 가난한 인간적 삶에 초자연적 가치를 부여하도록 돕는 묵상인 것입니다.

이런 묵상의 순간들과 소리 내어 올리는 우리의 염경기도(念經祈禱), 그리고 화살기도들 덕분에 우리는 하루 종일 하느님께 끝없는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겉보기에 치우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항상 서로를 생각하고 있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행동은 영적인 효과로 넘쳐날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방해받지 않고 주님과 친교를 맺기 시작할 때 그의 내적 삶이 성장해 굳세고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수행하기 위해 고되지만 매력적인 분투를 하게 됩니다. 덧붙여 말씀드립니다만, 이것은 선택받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가는 길이 결코 아닙니다. 이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기도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의 다른 측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도직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임무를 수행하는 일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 1,8)

두 번째는 ‘기도하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자기 희생과 순명, 그리고 온순함은 사랑으로부터 와서 사랑을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개인적인 관계를 맺어주고, 대화와 친교를 이끌어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 위격을 지니신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요구하며, 그런 대화의 친교로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1코린 2,11) 우리가 성령과 한결같은 친교를 가진다면 우리 스스로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제이며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우리 아버지께 간청하는 일을 지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과 대화를 나누는 습관을 갖도록 합시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실 분이십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의 도움을 청하며 우리에게 친밀하게 다가오신 그분을 느낍시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가난한 마음이 성장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며 하느님을 위해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겠다는 더욱 큰 열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묵시록의 마지막 환시를 다시 재연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靈)과 그 배우자, 즉, 성령과 교회,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청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모 마리아를 만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마음 깊이 품으신 것이 무엇인지 조금 더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권능과 위엄을 버리신 분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뛰어넘으셨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이 필요로 하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사랑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 깊은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인간의 육신을 취하게 하고 우리들 죄의 무게를 감내하시게 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때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러한 신앙의 진실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때까지 우리 영혼을 그 신앙의 진실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전지전능하신 그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의 삶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일들에까지 관심을 가지십니다. 여러분과 저의 일도 마찬가지이고, 우리들 한 명 한 명을 지명(指名)하여 부르고 계십니다.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이러한 확실성(確實性)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빛 속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비록 모든 것들이 예전과 똑같이 그대로이더라도, 우리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기도로 바뀌고, 결코 끝나지 않을 평화와 유머로 가득한 우리들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감사의 행위가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렇게 노래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46-49)

우리의 기도도 성모 마리아께서 드린 이 기도와 함께할 수 있으며, 또한 그분의 기도를 흉내낼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노래하고 찬미하고픈 열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인류와 모든 창조물들이 우리의 기쁨을 더불어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살아가는 것, 그분과 친밀하게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이 머무시는 거처’가 됨을 의미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요한 14,21) 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자 그리스도와 성부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영혼에 오셔서 그곳에 당신들의 집을 만드셨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이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모든 태도는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갈망하게 되고, 시편의 말씀이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편 63,2) 우리 마음속에서 이런 공허함을 일으키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들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요한 7,37)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성심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마음으로부터 안식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초대를 받아들인다면 그분의 말씀이 진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더욱 커질 것이고,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머무르셔서 그분의 빛과 온기를 우리로부터 결코 거둬가시지 않도록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불길에 다가갔습니다. 그 불길로 우리의 삶을 온전히 태우도록 합시다. 하느님 사랑의 불길을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그 거룩한 불을 온 세상에 퍼뜨리겠다는 열망을 키워갑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거룩한 불길을 가르쳐준 사람들 역시 하느님의 평화를 체험하고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심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왔을 때 절정에 이를 그분의 평화를 사회와 교회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영혼 안에 심는 것입니다.

성모님, 당신은 평화의 모후이십니다. 당신께서는 깊은 신앙으로 천사가 알려준 주님 잉태의 예언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성모님,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장하게 도우소서. 굳건한 희망과 더욱 깊은 사랑을 갖도록 도와주소서. 바로 그것이 오늘날 당신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이며, 그분의 성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