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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고랑»에는 형제애를 주제로 하는 12 항이 있음.

그대가 저에게 말하기를 매일 그대는 하느님 안에 더 뿌리 박게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매일 그대는 그대의 형제들과 더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 생활계획을 실행합니다: 그대는 일찍 일어나고, 기도하고, 성사를 자주 보고, 공부나 일을 많이 하고, 술취하지 않고 정욕을 극복하였지만, 무엇인가 빠져있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 점을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생각하십시오: 거룩함(聖性)이나, 또는 그것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은 사랑의 충만이기 때문에, 그대는 반드시 하느님에 대한 그대의 사랑과 주님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대의 사랑을 다시 보아야합니다. 그때에는, 영혼 속에 감춰져있는, 여지껏 싸워보기조차 하지 않았던 대단한 결함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대는 착한 아들, 착한형제, 착한동반자, 착한친구, 착한 동료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거룩함’만을 사랑하니까 질투가 많습니다.

그대는 많은 ‘개인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살지 않는 셈입니다. 한마디로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그대는, 정신이 산만하거나 또는 넋을 잃곤 한다고 말하거나, 또는 무미건조하고 수줍은 것이 그대의 성격이라고 변명합니다. 심지어 그래서 함께 사는 사람들조차 깊게 알지 못한다고 덧 붙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설마 그런 변명으로 만족하는건 아니겠지요?

일상 생활의 사소한 모든 것을 초자연적인 눈으로 보라고 그대에게 권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덧붙였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하루 종일 여러 번 그럴 기회가 있을 거라고요.

애덕을 실천한다는 것은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하느님을 향해 가는 길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지, 남이 그대와 똑같이 생각하고 그대에게 동참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을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병행하여 나아가는 길로서, 각각 자기 고유의 길을 걸어 신에 이르는 것이지요. 따라서 길을 비교해서 누가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지 궁금해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 중요한 것은 모두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니까.

그대는 말하기를 그 사람은 결점으로 가득차 있다고 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들은 천국에서만 발견된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신도 결점들이 있지마는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참아 주고 그리고, 그보다도 더해서, 그대에게 감사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굳건하게 가지셨던 사랑을 가지고 그대를 사랑하고, 그리고 그들이 적지 않은 단점들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서 배우십시오.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그대는 불평합니다. 그저사람은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언제쯤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할 생각입니까?

그래요. 인정합시다. 확실히 그 사람의 행동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열하고 비난할 만한 태도를 취했고, 무릇 품위가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아무리 경멸을 받아도 당연하다, 라고 당신은 덧붙였습니다.

거듭 말하겠습니다, 그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찬성은 할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의 보잘것 없는 생활도 성스러운 것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목숨을 속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주님이 경멸하지 않으셨던 생명을 당신이 경멸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대가 우정을 이유로 남의 비열한 행위에 공범자가 되어버렸다면 값어치도 없는 서글픈 동료가 된 셈입니다.

원래 가혹하게 정해진 것이 없는 인생은 때때로 참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훨씬 더 초자연적이 되고 하느님의 손이 보여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인간적이 되고 주위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사면을 부여할 수 있는가, 이는 권위자의 권한에 비례합니다. 단순한 판사라면 설령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해도 유죄 판결을 받고 죄를 인정한 범인에겐 형을 집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나라의 원수라면 때로는 사면이나 대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통회한 사람을 항상 용서하십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느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주님은 저의 어리석은 행동과 모욕적인 행위를 잊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맞이해 주셨습니다.” 이는 통회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20세기 돌아온 탕자가 형제들에게 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