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밭고랑»에는 겸손를 주제로 하는 13 항이 있음.

‘기도’는, 스스로의 헤아릴 수 없는 비참함과 하느님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사람의 겸손입니다.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을 예배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기대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이성의 겸손입니다. 이성이 겸손하면 스스로의 판단을 버리고 교회의 판단과 권위 앞에 엎드리죠.

‘순종’은 의지의 겸손입니다. 의지가 겸손하면 하느님 때문에 남의 뜻을 따릅니다.

‘정결’은 육체의 겸손입니다. 육체가 겸손하면 정신을 따릅니다.

외적인 ‘희생’은 감각의 겸손입니다.

‘속죄’는 하느님께 바친 모든 정념의 겸손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내적 싸움의 길에서의 진리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무(無)나 다름없는 자신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무(無)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 예수님의 겸손. 보잘것 없는 흙으로 빚은 그릇에 지나지 않는 그대에게 훌륭한 모범이 아닙니까. 항상 자애로운 주님은 그대의 천함을 무상으로 높여 은혜의 빛으로 빛나게 하고 일어서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존엄성과 정의 등을 위장한 채 수도 없이 스스로의 교만을 덮어왔습니다.주님으로부터 배울 얼마나 많은 기회들을 그대는 그것들을 초자연화할 줄 몰라서 낭비해 버렸는지오!

당신이 스스로 결점을 발견하거나 발견할 때마다 우울해지는데 우울할 이유가 없습니다.

참된 겸손을 청하십시오.

겸손의 부족함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표시를 몇 가지 생각나게 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을 남들보다 잘 말할 수 있고 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항상 내 마음대로 하길 바란다.

-안 통한다고 티격태격하거나 자기가 옳을 때 고집불통으로 우긴다.

-요구하지도 않고 애덕(愛徳)이라는 면에서도 필요치 않은데 자신의 의견을 내세운다.

-남의 사물을 경멸한다.

-자신의 재능이나 소질이 모두 빌려쓴 것임을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의 긍지와 평판뿐 아니라 밟고 있는 땅과 가진 것도 당신에겐 지나치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스스로를 모범으로 나타낸다.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다,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기 위해 자신을 일부러 나쁘게 말한다.

-혼났을 때 변명한다.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내려갈까 봐 부끄러운 것을 영적 지도자에게 숨긴다.

-자신에 대한 칭찬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좋은 소문에 기뻐하기도 한다.

-나보다 남이 더 좋은 평판을 받는 걸 알고 슬퍼한다.

-비천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거절한다.

-눈에 띄는 기회를 찾기도 하고 원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자찬의 말이나, 자신의 성실함, 재능이나 솜씨, 업무상의 평판 등을 암시하는 말을 자연스럽게 한다.

-모종의 재산 등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

겸손해진다는 것은 고통스럽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락함’이라 칭해져야 할 거짓된 겸손으로부터 도망쳐 나옵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의 발을 씻으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너는 나중에 그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저의 발을 결코 씻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설명하십니다: 만약에 제가 네 발을 씻지 않는다면 너는 나하고 관계가 없게 될 것이다. 시몬 베드로는 굴복합니다: 주님, 저의 발 뿐이 아니라 저의 손과 머리까지도요.

주저하지 말고 완전히 스스로를 바치라는 초대를 받으면 우리는 종종 베드로처럼 겸손한 척하고 싫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사랑에 대해서도 이 사도처럼 되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이 자기 이상으로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있기에 베드로는 이렇게 반응한 것입니다. : 여기 제가 있습니다! 저의 머리와 손과 발을 씻으시옵소서! 저를 철저하게 정화시키시옵소서, 저는 당신께 저 자신을 남김없이 봉헌하기를 원하옵니다.

그대를 위해서 편지 하나를 베껴놓습니다

“저는 복음서가 가르치는 겸손에 매료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중의 한 사람이 무의식중에 위축된 태도를 취하고, 그 결과 교회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에, 저 무신론의 작가가, 그리스도교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다…라고 말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확실히, 우리는 노예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녀 신분에까지 높여진 노예이므로, 정념(情念)의 노예와 같은 생활은 하지 않습니다.

“나쁜 자질”밖에 없음을 스스로 확신하고 있다면, 즉 자신을 잘 안다면 굴욕적인 일이나 경멸이나 중상 그 외를 받아도 초자연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기쁨과 평안이 더욱 더 확실히 마음속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경우에,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을 말한 후에 그대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가 말한 전부인가? 그는 별로 나를 모르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서 끝났겠는가…’

그대가 더 나쁜 대우를 받아 마땅함을 깨닫고, 그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그대가 당하지 않았다면 다른 어떤 사람을 괴롭히게 만들었으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기뻐하십시오.

조각상은 높은 곳에 있을수록 떨어질 때 타격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매번 더 한층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영적 지도를 받으러 가십시오. 그리고 시간에 맞춰서 가십시오. 그것 역시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一 말하고, 읽고, 꽃과 새의 이름을 알고,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고, 자기가 밟고 있는 땅을 알아보고 하는 것들을 교육받는 대단히 성실한 어린아이같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정년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도다…” 진정한 겸손이야말로 모든 덕의 초자연의 기초임을 날마다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 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성모님께 말씀드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