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 목록

24«밭고랑»에 겸손 → 약점때 겸손 항이 있음.

허약함으로 인해서, 즉 우리가 부서지기 쉬운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기는 하지만, 교회의 교리를 완전무결하게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용감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영웅적인 겸손의 마음으로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열심히 진리를 옹호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또 어리석은 과거의 반복. 그리고 후에 그대가 되돌아 왔지만 그대는 명랑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후반부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아직도 비참한 돼지먹이의 행복에 애착을 느끼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교만한 그대는 스스로의 약함에 상처받고, 용서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겸손해지면 하느님 아버지의 기쁨에 찬 환영이 반기고, 집에 되돌아온것과 새출발을 축하하는 잔치가 기다리고 있을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 충고해주신 것처럼 저는 저의 비참함을 스스로 비웃기로 했습니다. 비참함에 굴복해서는 안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저는 전보다 훨씬 더 행복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슬픔에 잠겨 버리면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끔 그대는 고민합니다. 무기력한 조짐이 나타나 열의를 잃게 만들고 아무리 희망을 구하는 기도를 거듭해도 만족스럽게 극복하지 못합니다.

상관없지 않습니까. 지금이 기회이고 더 큰 은혜를 하느님께 구하며 전진할 때입니다. 몸싸움에서 졌더라도, 투쟁을 위해 그대의 기쁨을 되찾으십시오.

의욕이나 열의 부족이 검은 구름덩어리가 되어 덮쳐 왔습니다. 완전히 얽매여 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슬픔이 소나기처럼 쏟아졌습니다. 그대는 포위 되었다는 강한 충동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여 낙담이 파고들어 옵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 즉 오랜 세월 싸워 왔는데… 아직도 아주멀리 뒤떨어져 있다는 현실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상태를 계산에 넣어 오십니다. ‘기쁨과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를 낙관적으로 만들어주는 하느님과의 부자관계를 확신할 뿐 아니라 스스로의 약함을 인정할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조만간 자신의 연약한 비참함을 깨달을 테니 몇 가지 유혹에 대해 미리 경고해 두고 싶습니다. 악마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내비칠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당신을 잊으셨다, 당신이 사도직에 불려간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세상의 괴로움과 죄의 무게는 사도로서의 당신의 힘을 초월했다라고.

즉시 그것들을 거부하십시오.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닙니다.

그대는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낡은 더러움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본능과 나쁜 쏠림은 매사에 민감하게 느껴져 마음에 불안의 구름이 드리워집니다. 게다가 원하지도 않고 예상치 못할 때, 피곤하고 의지가 휘청거릴 때에만 유혹이 엄습합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 견딜 수 없지만 내가 겸손한지는 모른다고 당신은 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때문에 주님의 사랑 때문에 아픔을 느낀다면 그 사랑에서 우러난 통회 덕분에 경계심을 늦추지는 않을 겁니다.

싸움은 여생 동안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스스로 결점을 발견하거나 발견할 때마다 우울해지는데 우울할 이유가 없습니다.

참된 겸손을 청하십시오.

조각상은 높은 곳에 있을수록 떨어질 때 타격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저는 아직도 형편없는 동물입니다”라고 그대는 저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그 점을 인식했을 때 한번은 그대가 그 점에 관해 퍽 나쁘게 느꼈습니다! 지금은 그 점에 익숙해지거나 그 점에 굴복함 없이 그대는 미소 짓고, 더해가는 기쁨을 가지고 그대의 싸움을 다시 시작하는 습관을 기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고집 센 것은 어리석음뿐입니다. 고집이 세다면 지독히 어리석습니다.

세상에 관한 일에서는 남의 생각이 옳을 수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같은 문제를 다른 빛, 다른 그늘, 다른 윤곽 아래에서, 즉 당신과 다른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도덕에 있어서는 유무를 막론하고 우리의 어머니 교회의 기준이 존재합니다.

그대는 어느 누구도 여지껏 스무 살이 되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그대는 그들이 나이 어릴적에 그들의 부모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합니까? 그대는 그들이 당신으로서는 막히는 문제들을, 아무리 크건 작건 다 극복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대가 지금 겪고 있는 것들과 같은 일들을 겪었고, 그들은 은총의 도움으로 성숙했습니다. 그들은 관대한 인내력으로 자신들의 이기심을 짓밟았고,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할 때는 굽혀들었고, 그들이 그렇게 해서는 안될 때에는 우쭐하거나 누구인가를 해치거나 하는 일없이 —조용하고 겸손하게— 성실성을 유지했습니다.

그대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대단히 가톨릭적입니다. 기숙사 분위기도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미사는 정오가 아닌 데다 수업도 오전 중이라 술 한두 잔을 한 후에 저녁에 늦게 공부할 수 없는 게 아쉽다고 합니다. 그대의 그 “가톨릭”은 가짜, 단순히 부르주아적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대의 나이에 그같이 생각하면 안 되는걸 모릅니까? 나태함이나 자기숭배를 버리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에, 당신 주위의 현실에 스스로를 맞추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대는 그대의 가톨릭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성인상(聖人像) 하나를 어느 교회에 헌납했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성인은 실재로 모든 것을 저에게 신세졌습니다.”

이것은 풍자 만화일뿐이 아닙니다. 당신도 역시 생각하도록 하심시오 —적어도 그것이 그대의 행위에서는 어떻게 보이는지— 그대는 그저 몇 개의 메달들을 패용하거나 또는 모종의 경건한 관습을 다소간 기계적으로 실천하는 것만으로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이 내가 하는 좋은 일들만 볼 수 있다면!…’ 하지만 그대는 남들에게 잘 보이도록, 좋은 일들을 바구니 안에 든 하찮은 물건인양 들고 다니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합니까?

“그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되도록.” 이라고 하신 예수님 계명의 둘째 부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칭찬해야 할 나 자신에게.’ 어느 책의 첫 페이지에 헌사로서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수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일생의 마지막 장에 같은 말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대와 내가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생을 마감한다면 정말 슬픈 일입니다. 진지하게 양심성찰을 합시다.

교회일이나 사람들, 형제들에 관한 일 등에 대해 결코 자신만만한 태도를 취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만만한 태도가 사회 활동에서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사람들의 이익을 지켜야 할 때입니다. 그럴 경우 그것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아니라 조용하고 겸손하게 실행하는 신앙과 강인함이 넘치는 태도가 될 것입니다.

그대의 선의가 언제나 겸손과 함께하는가를 확인하십시오. 왜냐하면 선의는 가끔 거의 양보할 여력이 없는 가혹한 판단과, 모종의 개인적이거나, 국가적이거나, 또는 당파의 우월감과 함께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실패를 보고도 실망하지 말고 그것에 반발하십시오.

결실이 없는 것은 - 특히 통회하고 있다면 - 실패한 결과라기보다는 교만의 결과입니다.

쓰러졌다면 이전보다 더 큰 희망을 가지고 일어나십시오. 잘못을 해도 행실을 고치기만 하면 자기를 알고 겸손해지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오직 자기애에 사로잡혀 있을 때 뿐입니다.

“우리들은 쓸모없다”라는 것은, 비관적이고 거짓된 주장입니다. 만약에 첫째가고 기본되는 요건인 ‘하느님의 도움’을 가지고 원한다면, 여러 가지 사업들을 위한 좋은 도구로써 쓸모있게 될 수 있습니다.

한 거만한 사람을 보고 하느님이 하신 엄하지만 정확한 말씀을 들었을 때 저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는 악마와 똑같은 가죽 —교만을 덮어쓰고 있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내 마음에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덕을 몸에 지니고 싶다는 성실한 소망이 마음에 솟아났습니다. 겸손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시선을 주님의 모친이시며 우리들의 모친이신 분께로 끌어당겼습니다: 겸손이란 자신이 무(無)임을 자각하고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한번의 나무라심도 없이, 사랑에 찬 모습으로 그의 마음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이 쓰러져 버리고 나면, 같은 눈으로 우리들을 보십니다. 우리들 역시 베드로가 했던 것같이, 주님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십니다”라고 말하고 우리들의 생활을 고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